우리동네이야기-11/운천뜬구름동네기록관(상)

테이프 속 치열한 삶의 흔적들을 재생시키며 김기성 운천뜬구름 동네기록관 대표

2024-07-15     동양일보

[동양일보]‘고요한 흰 구름은 허공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잔잔히 흐르는 물은 큰 바다 복판으로 흘러든다.’- 백운화상어록, <무심가> 중

<뜬구름 동네기록관>은 운천동이란 지명에 착안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구름이 있는 우물’이라는 뜻의 운천동은 명실상부 직지의 창조 정신이 깃든 동네이며, 이곳에 동네기록관이라는 기록문화의 거점을 마련하면서 그 정신을 되새겨볼 수 있는 별칭을 하나 정하고 싶었다.

그렇게 떠올린 것이 바로 ‘뜬구름’이었다.

흔히 ‘뜬구름’이라는 단어는 허황된 꿈을 쫒거나 세상일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의미로 쓰이지만, 무수히 많은 정보와 이미지들이 빠르게 범람하는 작금의 시대에 뜬구름 같은 기억과 기록들이 모여드는 여유의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재생(Play-back and Regeneration) 프로젝트

2021년 운천동에 <뜬구름 동네기록관>을 구축하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프로젝트의 핵심 키워드는 ‘재생’이다. 재생은 두 가지 중의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하나는 ‘기록 매체에 저장된 내용을 출력’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쇠락한 지역에 새로운 활력소’를 찾는다는 의미이다. 전자의 ‘재생(Play-back)’은 시민들의 옛 아날로그 비디오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프로젝트로 진행되었고, 후자의 ‘재생(Regeneration)’은 도시재생사업 등 변화가 한창 진행 중인 운천동에 대한 리서치 및 기록 작업으로 구체화 되었다.

‘곰팡이 슬어버린 삶의 기록들’

오랜만에 옛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재생해보려는데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결혼할 때 고가의 돈을 주고 장만했을 기계인데, 세월 앞에 속절없이 멈춰서버린 것이다. 어렵게 전파사를 찾아 고쳐보려 하지만 부품이 없어 고치지 못한다는 말만 돌아온다. 그제서야 기록을 재생할 매체가 없이는 기록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비디오테이프는 서서히 서랍장 안에서 곰팡이 슬어간다.

비디오테이프를 맡기러 온 시민들 대부분은 비디오 플레이어가 고장났거나, 이사하면서 고철로 버려버린 탓에 수년간 영상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테이프 속 곰팡이를 가리키며 영상이 지워지거나 하지는 않았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숨가쁘게 삶을 살다보니 그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애쓴 건 아닐까?

최신형 가전제품으로 교체하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정작 자기자신의 삶의 원형은 언제부턴가 서서히 소실되어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곰팡이 슨 비디오테이프를 겸연쩍게 건내는 시민들의 표정에서 간절한 마음이 읽혀진다. 나는 마치 의사라도 된 양 테이프 표면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곰팡이를 알코올솜으로 조심스레 소독한다. 한결 말끔해진 테이프를 기계에 넣고 재생을 시작한다. 테이프 속에는 치열했던 삶의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 결혼식, 신혼여행, 돌잔치, 재롱잔치, 학교 운동회, 졸업식, 회갑연 등등 영상 속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치열하다.

뜬구름 동네기록관에서는 2021년부터 총 150개 가량의 아날로그 비디오테이프를 변환해왔다. 올해도 40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변환할 계획이다.

서랍 속에서 곰팡이 슬어가는 소중하고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 가득 모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