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장독대
정명숙 수필가
[동양일보]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성장이 빠른 체리 나무가 타원형의 잎을 바람에 맡기고 흥에 겹다. 비가 반가웠나 보다. 내년이면 단풍나무와 함께 장독에 내리는 따가운 해를 조금이라도 가려 줄 터, 장이 제대로 익는 데 한몫할 재목들이다.
장독대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다. 내 마음대로 채우고 비우기도 하면서 자식 보듬어 안 듯, 애지중지한다. 마음 심란한 일이 생기면 장독마다 뚜껑을 열어보고 반들거리게 닦다 보면 출렁이던 마음결이 잔잔해진다.
나는 장독대를 눈에서 벗어나지 않게 주방 앞에 뒀다. 동남향으로 햇볕이 잘 들고 막힌 곳이 없어 바람 드나들기도 좋다. 큰 장독은 뒤쪽에, 중간 항아리는 가운데, 그리고 작은 것은 앞에 뒀다. 큰 독에는 묵은 간장 한 단지와 메밀꽃이 피었다가 진 햇간장이 있다. 된장 단지는 네 개다. 한해가 지날 때마다 장독 위에 조약돌을 하나씩 더 올려 묵은 햇수를 알린다. 그리고 무장아찌를 품고 있는 장아찌용 고추장 단지 하나, 재작년에 담근 고추장 단지, 큰독 세 개에는 천일염을 가득 채웠다. 삼 년은 묵혀야 짠맛과 쓴맛이 없어지고 단맛이 나서 항아리가 빌 때마다 소금으로 채우다 보니 소금단지도 여러 개다. 잔잔한 항아리에는 종류가 다른 장아찌가 담겨있다.
예년보다 일찍 고추장 항아리가 비었다. 빈 단지에 물을 채우며 마음이 허전하다. 해마다 거르지 않고 넉넉하게 담그는데 올해는 동기간과 지인, 문우들과 나눠 먹다 보니 금세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아직 햇고추장을 담그려면 10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장 담그는 일은 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것이라서 진득하게 기다려야 함에도 조급증이 생기는 건 아이의 말이 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선가 보다.
몇 년 전, 추석날 아침이었다. 여섯 살 외손녀를 데리고 성묘를 가는 길이었다. 옆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고 있던 아이가 나를 보고 전날 밤에 둥근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무슨 소원인지 궁금해서 물었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시라고 이렇게 두 손 모으고 달님에게 빌었어요.”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왜 오래 살아야 하는지 재차 물었다.
“할머니가 안 계시면 누가 된장 담가요? 엄마는 배울 생각도 하지 않고 이모도 안 하고, 그러니까 할머니가 된장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돌아가시면 안 돼요.” 이유는 된장이었다. 어린 것의 입에서 된장 담글 걱정이 나오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딸이 사업한답시고 몇 년 동안 친정살이했다. 바쁘게 돌아치는 제 어미 대신 아기를 돌보는 건 내 차지가 되었다. 첫돌이 지나면서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데 나는 심심한 된장국에 된밥을 먹였다. 이유식보다 좋아했다. 소화도 잘 시켜서 하루에 두어 차례 황금색 변을 봤다. 똥도 이뻤다. 딸도 신기하다며 아기 먹이는 음식에 까탈을 부리지 않았다. 아이는 커 가면서 삼시세끼 두부 많이 넣고 끓인 된장찌개만 찾았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은 고추장에 무친 삶은 냉이를 집에서 담근 고추장에 무쳐주면 밥을 비벼서 아주 달게 먹는다, 간식으로는 고추장과 된장을 넣어 부친 장떡을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장맛에 길들어서인지 편식도 하지 않고 건강해서 또래보다 키가 크고 똘똘하다.
친정어머니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장독은 모두 내 집으로 가져왔다. 옛날 독이라 투박하면서도 크다. 요즘 사람은 보관도 쉽지 않을뿐더러 쓸모없다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나에게는 보물이다. 집에 있는 것도 많은데 다 무엇에 쓸 거냐는 핀잔에도 가져온 데는 이유가 있다. 빈 항아리마다 된장과 간장으로 가득 채워놓고 내가 가고 난 다음에 자식들이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게 하고 싶어서다.
나는 콩을 몇 킬로그램 산다고 하지 않는다. 해마다 메주콩 서 말 삶고 고추장 담그는데 고추 10근과 보리쌀 한 말 띄운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해야 장류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고 장맛도 좋아질 것 같아서다. 빠르고 효율적인 시대에 뒤처지는 사고방식이라 해도 개의치 않는다. 느리지만 내공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이가 하나둘 늘어 날 적마다 손녀의 바람대로 장 담그는 일로 오래 살아야 하는 핑계가 물색없이 좋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장독대 앞에 선다. 긴 시간, 서로에게 스며들어 깊은 맛으로 익어가는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닮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