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드라마와 현실

한만수 시인·소설가

2024-08-01     동양일보
한만수 시인·소설가

[동양일보]지금은 방영이 끝난 교양드라마 중에 '전원일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탤런트 최불암의 가족을 기준으로 양촌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드라마다. 총 1,088회나 방송이 된 장수드라마가 폐지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22년 2개월 동안 방영이 되면서 출연진들 스스로 한계에 도달하여 더는 연기를 못하겠다고 했다는 점이다. 경제발전으로 농촌과 도시의 경계가 모호해짐으로써 시청률이 떨어지는 점도 작용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이유로 '전원일기'가 종용이 되었지만, 시청자들이 아쉬워하거나, 시청률에 상관없이 '전원일기' 수준의 드라마는 있어야 한다는 염원은 없었던 것 같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방영이 되는 '전원일기'의 소재는 농촌에서 일어나는 아픔이나 고통, 도시인들에게 피해를 당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순박한 양촌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드라마가 방영 중인 1980년대부터 2002년까지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전원일기' 시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인들의 눈에는 귀향하고 싶은 이상적인 농촌으로 보였겠지만 농촌의 현실은 이웃사촌이라든지, 두레문화가 사라졌을 때이다.

요즘에도 농촌 사람들은 외면하고 도시인들이 시청하는 전원일기가 진행 중이다. 예전에는 동네에서 떨어져 있는 집을 ‘외딴집’이라 불렀다. 요즈음은 외딴집을 ‘전원주택’이라 부른다.

전원주택에 사는 거주민 대부분 '전원일기'를 감명 깊게 시청했던 세대들일 것이라 짐작한다. 전원주택은 대부분 산 중턱이거나, 계곡 옆, 아니면 동네에서 높은 곳에 있다. 발코니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농촌에 살려면 가끔 마을청소도 해야 하고, 초상이 나면 귀찮더라도 장례식장에 가서 심부름도 해 줘야 하고, 읍내 마트에 나가는 길에 어른들의 심부름도 해 줘야 한다.

전원일기를 즐겨 보던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다. 쓰레기봉투를 받겠다며 마을회관으로 갔다가 이장이나 동네 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난다. 마을청소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쓰레기봉투를 줄 수 없다. 법적으로 이 마을 사람인데 왜 안 주느냐? 다퉈 봤자 마을 사람들에게 호되게 훈계만 듣기 일쑤입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자존심은 도시인들이 감히 범접을 못 한다.

농촌에서 집 밖을 나가며 모든 것들하고 싸워서 이겨야 먹고 살 수 있다. 당장, 잡초를 이겨내야 하고, 병충해를, 태풍을, 도시로부터의 유혹을, 힘든 육체를 이겨내야 살 수 있다.

전원주택에서 살다 보면 동네 사람들과 다르게 모든 것들로부터 패배를 당하며 산다. 도시에서는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하지만, 전원주택은 마당의 잡초를 뽑아야 한다. 텃밭에서는 욕심부려 심어 놓은, 고추며, 상추, 토마토, 오이, 가지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자연식이라고 질리도록 먹고 나니까 나중에는 원수로 보인다. 토마토는 저 혼자 물러 터져 진딧물이나 새들이 매일 파티를 연다. 상추는 제때 잎을 따주지 않아서 무릎 크기로 자라서 꽃을 피운다. 결국, 텃밭 일구는 것보다는 읍내 마트에서 사 먹는 것이 현명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텃밭 일구기를 포기하면 그나마 소일거리가 사라졌으니 외로움과 싸움이 시작된다. 산에 살면서 등산을 한다는 것도 멋쩍은 일이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도 처음에는 인사치레로 몇 번 오지만, 결국은 동네 삼겹살집에서 구워 먹는 것이 훨씬 맛있다는 걸 알게 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전원일기'는 방영이 끝났지만, 도시인들에게는 아직도 영원한 파라다이스로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