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강익중 내가 아는 것
이상봉 청주시립미술관장
[동양일보] 올해가 통합 청주시 10주년을 맞는 해이다. 소통과 화합의 메시지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강익중작가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강익중 작가는 청주 출신으로 9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특별상을 수상하였고 뉴욕을 기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자랑스러운 청주의 작가이다. 작은 조각을 하나하나 만들고 그리며 시간의 누적에 따라 집대성되는 거대한 규모의 작품들은 많은 감동을 준다. ‘강익중 청주 가는 길’은 상상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작가가 걸어온 지난 40년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3인치 화가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 삼라만상에서 한글 프로젝트 내가 아는 것, 달항아리 시리즈, 평화와 화합을 염원하는 작가의 드로잉과 TV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를 찰라의 장면을 캡처하듯 그린 1,000개의 드로잉, 실향민들이 고향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을 매단 철조망 설치작품, 무심천과 우암산을 소재로 한 작품까지 작가의 40년의 예술세계를 조명한다. 신작인 무심천을 소재로 한 설치작품은 작가가 평소에 가졌던 고향에 대한 향수의 마음이 담겨 관람객들에게 많은 공감을 하게 한다.
2002년부터 작가는 한글을 소재로 작품을 추구하는데 시립미술관 1층 대전시실에 ‘내가 아는 것’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알록달록한 자음과 모음의 색채를 구분하여 한글을 빼곡하게 적어 넣었다. 비우고 비워도 마음은 다시 채워진다. 만병의 근원은 성냄에 있다. 글자 하나 하나 읽다 보면 낮익은 문구들이 재미있고 작가의 마음도 읽혀진다. ‘내가 아는 것’ 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일화가 흥미롭다. 작가는 장모님을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강작가에게 이렇게 묻더란다. 자네는 아는게 뭔가? 추측해 보자면 딸을 가진 부모로서 당시 강작가가 미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탐탁치 않은 마음에 내 던진 말이 아닐까 하는 부모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관점이기도 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면 누구나 들어서 기분 좋은 멘트는 아니다. 그렇치만 강작가는 장모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내가 아는게 뭐지? 하며 생각의 끈을 이어가 하나 하나 기록을 해 보았다고 한다. 작가의 타고난 성격인지 모르지만 본인이 아는 것을 하나 둘씩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아진 것이 수백 가지가 되고 그것이 오늘의 내가 아는 것의 작품이 된 것이다. 작가가 지닌 세심함은 사소한 말도 허투루 듣지 않고 곱씹어서 작품으로 이루어 낸 것이다. 작가의 수용하는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는 사소한 것을 작품으로 일구어 내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짧은 대화 속에서 나눈 말이지만 작품으로 승화되어 관람객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오늘날 각박하게 살아가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 이기도다. 우리는 사소한 언쟁에서 시작된 것이 불씨가 되어 큰 싸움으로 확대되거나 때로는 살인도 서스름 없이 저지르는 일들을 뉴스를 통해 종종보게 된다. 사소한 것이지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긍정의 마음으로 대하는 삶의 자세가 오늘의 강익중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상대방이 어떠한 의도로 말을 한 것 보다는 내가 어떻케 듣고, 판단하고, 새기며 긍정의 마음으로 작품의 소재가 되어 발전시켜나가는 작가의 태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교훈을 주고 있다.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와 나눈 대화에서 느낀 점은 한마디로 해맑음이다. 숱한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긍정의 마음을 지키며 해맑은 태도는 많은 사람들이 작가를 좋아하게 만드는 매력인 것 같다. 작가는 선조부터 내려온 그림쟁이의 유전자를 지녔고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하여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래서 홍익대학교에 진학 했지만 부친의 사업 실패와 쟁쟁한 실력을 갖춘 대학 동료들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을 소홀히 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냈다. 졸업 후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른다. 뉴욕은 세계미술의 중심이 된 도시로 전 세계에서 많은 미술인들이 몰려든 곳이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하루 12시간을 일하며 작업의 끈을 놓지 않고자 작은 조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그리며 모은게 천개가 되고 만개가 되어 주변인의 권유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후에는 백남준선생과 전시회를 하게되는 영광을 누리며 주목을 받게 된다. 97년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여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지금도 전세계를 누비며 각종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1997년에 북한을 방문하고서 마음속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예술가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 작가는 북한 어린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기 두번씩이나 방북을 할 정도로 남북통일을 꿈꾸는 열정을 지닌 예술가이다. 아이들이 그린 천진한 마음을 모으고 실향민들의 애절함을 모아 통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의 태도는 마치 평화를 추구하는 행동주의자 같다. 이번 전시 중에서 가장 애착이가는 작품을 물으니 주저없이 실향민들이 그린 그림으로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말한다. 어릴적에 살았던 고향이며, 마을의 약도, 자손들에게 부탁하는말등 피카소보다 훌륭한 그림이라고 치켜세운다. 통일의 꿈을 실현하고 임진강에 남북을 잇는 ‘꿈의 다리’를 만들겠다는 그의 소망을 보면서 마치 거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예술가는 망망대해와 같은 바다에 낚시대를 던지는 사람이라고 비유하는 것처럼 통일을 향한 그의 포부를 보면서 사뭇 겸허함을 느끼게 한다. 여러모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예술가 강익중의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곧 도래하기를 함께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