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오래된 향기(1984∼2024년)
양선규 시인·화가
[동양일보]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가끔 쉬어 가기도 하면서 줄기차게 내렸다. 해마다 7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마다. 사람들은 비를 생명의 비, 단비라고 말하지만 비는 지나치면 모든 것을 잠기게 하고 휩쓸어 가는, 불보다도 더 무서운 마력을 지니고 있다.
장마철에는 큰 홍수로 인한 안전 문자가 줄을 잇고 매스컴에는 비 피해로 인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연 이어 보도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영동의 양정천과 주곡천이 합수하여 금강하구로 흐르는 이수천의 물도 범람의 위기가 있었으며, 논과 밭이 침수되거나 유실되고 저수지의 제방이 폭우로 붕괴되기도 하였다.
여름은 땅 위에서나 땅속에서 생명을 키우고 때로는 하늘에서 천둥, 번개를 치며 비를 내리고 뙤약볕과 폭염을 주기도 하며 한바탕 소란스럽다. 뒤돌아 보면 우리가 살아온 세월도 폭우와 천둥, 번개 잠시도 편안한 날이 있었던가. 어쩌겠는가. 다 하늘의 뜻이니 그냥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살다 보니, 1984년 굴레미술전(대전문화원)을 시작으로 미술 작품 활동을 했으니 금년이 화단 활동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뒤돌아 보면 아득한 세월이다. 나도 이제 그만큼 나이를 먹은 셈이다. 굴레미술동인의 구성은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미술대 진학을 위해 같은 화실에서 동문수학하던 학생들로 공주사범대, 중앙대, 충북대, 한남대, 홍익대 등으로 진학한 미술대생 20여 명이 뜻을 모아 함께한 미술 단체다.
40여 년 전 1984년 9월 29일 개최한 굴레미술동인 창립전 때부터 참여했던 미술 작품 전시회 리플릿과 오래된 작품들을 살펴보니 감회가 새롭다. 1980년대 철모르던 젊은 시절, 꿈을 키우던 학창 시절과 함께 했던 벗들이 그립다. 고등학교 졸업 후 20대는 또 다른 인생의 출발점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정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무던히 애쓰는 시기이며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 정립으로 무한히 펼쳐진 삶의 여정에 항해사가 되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뒤돌아 보면 그때만큼 절실하면서도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굴레미술동인 창립 때부터 함께 했던, 사제동행 미술교육을 실천하는 복대중학교 강석범 교감과 다양한 전시 기획과 작품 활동으로 분주한 이상봉 청주시립 미술관장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다행히 함께 했던 동인들 대부분 쉬지 않고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대부분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0여 년 동인회 활동을 함께 하다 중간에 전시회가 어렵게 되어 서로 갈 길을 가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붓을 놓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깊은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다 보니 오래된 것에 관심이 많다. 긴 세월 함께했던, 이젤과 캔버스, 팔레트와 오일 통 등이 그렇고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40여 년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는 화우들이 그렇다. 가끔 지난 시절에 그렸던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 시절의 흔적과 향기가 배어 나와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