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 박원규 청주시립미술관장

직업인으로서의 마지막 길, 온전히 역할 다할 수 있기를 미술관은 쉼터... 많이 봐야 ‘나름의 식견’ 누릴 수 있어 사람도, 그림도 마음이 움직여야 소통·공감할 수 있어

2024-09-08     박현진

[동양일보 박현진 기자]2024년 8월 어느날 오후. 120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의 복도가 들썩였다. 24년차 청주문화재단의 ‘시조새’를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 시조새는 쥐라기에 생존한 조상새로, 재단 창단부터 존재한 그에게 직원들이 붙인 애칭이다.

수십 개 꽃다발이 준비되고 아쉬움의 한숨과 안녕 기원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조새’는 울컥했다.

24년의 세월을 잘못 살진 않았다는 안도감과 새 일터에 대한 긴장감이 묘하게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그랬다. 그는 청주문화재단이 창립되던 해인 2001년 재단에 입사해 공예진흥팀장, 영상위원회 사무국장, 공예관 학예실장, 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동부창고 총괄기획자 등을 역임하며 베테랑 기획자로서의 능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재단에서만 근무한 건 아니다.

그는 67년 단양 출생으로, 운호고와 서원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청주대 대학원 회화학과에서 매체미술전공으로 미술학 석사 학위를 받은 모태 ‘미술학도’이다.

졸업 후 청주예총 사무국장(전해달 회장 재임시절)으로 재직도 했었고 1990년대 후반 청주 월천갤러리를 위탁 운영하기도 했다. 그 시절 충북은행(조흥은행 전신. 현 신한은행) 홍보관으로 ‘조흥갤러리’를 담당했던 아내 장미경(56)씨도 만나 결혼, 2남을 두었다.

그렇게 예술계 중심, 또는 언저리를 돌고 돌아 직업인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시립미술관장에 임용된 사람, 그는 박원규(57) 신임 청주시립미술관장이다.

 

지난 6일, 부임 닷새 만에 박 관장을 만났다.

다과로 손님을 대접하기보다는 사과주스 음료 한 병을 내미는 게 익숙한 그는 ‘일꾼의 상징 티셔츠’ 차림이 아닌,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슈트 차림이 어색한 듯 옷매무새를 종종 가다듬곤 했다.

“아직은 현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면서도 “미술관을 드나들며 불편했던 부분부터 바꿔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박 관장.

우선은 1층 로비에 무인카페식 휴게공간을 만들겠다고 했다. 청주시립미술관이 주변 경관도 수려하고 휴게공간으로서의 여건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1, 2, 3층 전시공간을 다 돌고나면 앉아서 잠깐의 휴식을 취할 공간도 없다는 것, 특히 중장년 관람객의 불만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며 1층 로비에 재료비만 받고 운영하는 저렴하면서도 편안한 휴게공간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소통의 문제를 들었다. 현재 청주시립미술관에는 20명 남짓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데 기간제인 학예담당 직원 8명과 정년제인 관리팀 직원 7명이 각기 다른 사무실을 쓰고 있단다. 이에 사무실도 합치고 업무도 교차 분배해 서로 소통하며 지원하겠다고 했다. 직원 간의 소통도 원활하게 하고 그렇게 섞임으로써 남는 공간은 교육실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존 13명 운영위원회와의 소통 또한 중요한 일이며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했다.

세 번째는 회원제 도입이다. 시립미술관을 이용하는 관람객들에게 회원제를 통한 회원카드도 발급하고 전시나 이벤트 소식 공유는 물론 다양한 정책으로 마일리지나 혜택을 주는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설명이다.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됐지만 박 관장은 신임관장으로서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했다.

청주시립미술관인 만큼 청주의 신진작가를 많이 발굴하고 기존작가 초청 전시회로 그들을 외부로 소개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전 세계적으로는 힘들어도 우선 아시아권 중심의 국제교류로 미술관을 교류의 허브로 만들 계획이다.

작가들에 대한 부탁도 잊지 않았다. “갤러리와 미술관은 차이가 있다. 미술관을 활용한 전시 기회를 많이 갖되, 작가의 자존심을 세워가며 작품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갤러리에 대한 활용도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리베이트에 대한 반감, 전업작가로서의 생계문제, 내 작품에 대한 정체성과 가치 등 많은 혼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미술관 문턱이 높다고 어려워하는 관람객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작품을 보고 뭔가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봤으면 한다. 그냥 보다보면 작가가 보이고 그 작가의 전과 후의 경향을 비교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주관대로 해석하는 능력이 생긴다“며 ”많은 사람들이 일단 미술품에 대한 부담이나 꺼리는 마음을 버리고 미술관을 찾아오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요리담당자(요리‘가’는 아니기에)가 되곤 한다는 박 관장. 그는 요리가 재미있어 만들기는 하지만 어떤 요리를 잘하냐는 질문에는 ”있는 재료 다 넣어서 뒤섞는 정체불명의 요리“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틈만 나면 온 가족 함께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자신을 스스로는 ‘100점 가장에 100점 남편’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박 관장은 정작 앞선 직장을 떠나게 된 배경을 말할 때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사실 기존 직장에서 임금피크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인형’ 같았다. 평소보단 깎였음에도 신입 직원들보다 훨씬 많은 월급을 받으며 하는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나의 모습, 내가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닌지, 내 정체성 등등 자괴감도 들고... 참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고 그 시간에 속했을 많은 중장년 세대의 아픔을 대변하듯 심정을 토로했다.

누군가에게는 끝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시작이 되기도 할 그가 선택한 마지막 직업은 10년 후 온전히 창작인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그의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가 아닐까.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