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나의 힘-출향예술인을 찾아서/ 공공미술가 강익중(1)
“청주는 가슴속에 있는 고향”… 개념을 담는 참여형 공공미술가
[동양일보]무심천·우암산은 그의 유년기 놀이터
강익중(64)이 청주에 왔다. ‘청주 가는 길:강익중’ 전시와 함께.
지난 7월4일부터 9월29일까지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청주·청원 통합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자 화가 강익중의 40년 화업을 회고하는 전시로, 3인치(7.6cm) 작업인 해피월드, 달항아리 시리즈, 한글 프로젝트와 신작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덮은 대형 작품이 눈에 띈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했다던 ‘무심천’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보고 있으면 검붉은 물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흘러내리는 듯 역동적이다.
강익중의 전시는 1층 전시장에서 시작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높이 10m의 높은 벽과 바닥을 빼곡히 채운 색색의 한글에 위압감이 느껴진다. 강익중이 40년 가까이 비망록처럼 적었던 ‘내가 아는 것들’ 모두 3000자, 200문장이다. 결혼 직후 장모로부터 “자네는 아는 게 뭔가?”라는 질문을 들은 뒤 그날부터 자신을 돌아보며 아는 것을 공책에 적기 시작했단다.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 “비우고 비워도 마음은 다시 채워진다.”, “인생은 누구나 처음이라 전문가가 없다.”, “뜨거운 백사장 위를 달리면 무좀이 사라진다.”, “시간이 되어야 기차가 떠난다.”, “이건 정말 신기한데 뉴욕과 서울은 날씨가 거의 같다.”
그는 그 많은 문장들을 벽에는 페인트로, 바닥엔 시트지로 붙여 나갔다. 2층 전시장에는 3인치 캔버스 1만여 개에 다양한 오브제들이 곁들여진 ‘삼라만상, 해피월드’, ‘달항아리’ 시리즈와 ‘1000개의 드로잉’, ‘꿈의 다리’ 등 작가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강익중. 그에게 청주의 무심천과 우암산은 무엇인가.
그는 청주시 옥산면 덕촌리 외가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무심천과 우암산은 그의 놀이터였다. 뉴욕에 살면서도 청주는 늘 그의 가슴 속에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아는/ 손을 잡지 않아도 통하는/ 오랜만이라도 낯설지 않는/ 멀지만 가까이 있는/ 마음 한구석에 숨 쉬고 있는/ 그 플라타너스 터널이 반겨주는/ 잠 못 이루는 밤에 생각나는/ 우암산이 기다리는/ 바람이 들려주는/ 보듬지 않아도 피어나는/ 울 어머니 좋아하셨던/ 레이니어 체리 같은’ –시. 청주가는 길 전문
3인치 캔버스 작품 10만장
세계적인 화가이자, 설치미술가, 공공예술가인 강익중은 1960년 청주에서 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4년 뉴욕의 명문 미술대학인 프랫인스티튜트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의 뉴욕 생활은 빡빡했다. 주중엔 식품점, 주말엔 벼룩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고 경비를 서고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학교를 다녔다. 캔버스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손으로 쥘 수 있는 3인치 캔버스를 만들어 오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작업을 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3인치 작품의 시작이다. 3인치의 캔버스에는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의 추억, 암기했던 영어단어 등 그가 만나고, 알고 있고,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일상의 단편들이 기호나 문자, 그림으로 채워졌다. 때론 캔버스 위에 바느질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3인치 작품이 현재까지 10만장이 된다.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과 〈멀티플/다이얼로그〉전을 열면서였다. 세계적인 화가 백남준과 공동 전시를 하는 무명의 젊은 작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2018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강익중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94년 어느 날 전화가 한 통 왔어요. 휘트니미술관이라면서 백남준 선생님과 저의 2인전을 기획했는데 의사가 있느냐는 거예요. 머뭇거리고 답을 못했더니 5분 만에 또 전화가 왔어요. 제가 거기가 어딘지 주소를 모른다고 하니까 기가 막힌 지 ‘아니 휘트니 미술관을 몰라요?’했어요. 그 당시 독일에 있던 백남준 선생님이 팩스를 보내 ‘나 대신 익중에게 좋은 자리를 주라’고 하셨대요. 물론 그렇게 하진 않았지만, 백남준이란 분이 어떤 분일까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휘트니 전시 후 백남준은 그에게 “한국에서 다시 2인전을 열자”고 했는데 실현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백남준이 세상을 뜬 지 3년 후인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멀티플 다이얼로그(Multiple Dialogue ∞)전’이라는 이름으로 추모를 겸한 전시회를 열었다.
국내에서 강익중 이름을 알린 첫 전시는 1996년 아트스페이스 주최로 조선일보미술관과 학고재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린 ‘모든 것을 던지고 더해라’ 전시였다. 강익중이라는 떠오르는 화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수상으로 강익중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대중 이롭게 한다는 의미 ‘익중(益中)’ 개명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은 경중이었다. 어느 날 스님이 대중에게 이롭게 한다는 ‘익중(益中)’으로 고쳐 주었는데, 어쩌면 그 이름이 공공미술가의 운명으로 안내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일찌감치 공공미술에 뛰어들었다. 미국으로 간 이듬해인 1985년 롱아일랜드 부르쿨린 캠퍼스에서 1000개의 작품들을 선보인 뒤, 1986년 독일 카젤에서 ‘날으는 그림들’로 공공퍼포먼스에 참여했고 이후 매년 뉴욕에서 설치와 공공퍼포먼스 전시를 열었다.
퀸즈 플러싱의 메인스트리트 역에 대형 모자이크 벽화 ‘해피월드’를 건 이후, 실외에서 열리는 전시는 점점 더 대형화 주제화 됐다.
대표적인 공공미술작품으로는 국외에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청사 메인홀의 벽화와 뉴욕 지하철역의 환경조형물, 뉴욕 기차역 플랫폼의 천장 설치작품, 프린스턴 공립 도서관의 로비 벽화 ‘해피월드’,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전시 ‘내가 아는 것’(2010), 런던 템즈 페스티벌의 메인 작품인 ‘집으로 가는 길’(2016) 등이 있고, 국내에는 파주 통일공원 ‘10만의 꿈’(1999), 광화문 복원 현장 가림막 ‘광화문에 뜬 달: 산, 바람’(2008~2010), 전국 5만 어린이들의 꿈을 모아 만든 경기도미술관의 ‘희망의 벽’, 순천만 국가정원의 ‘꿈의 다리’(2013), 오두산 통일전망대 ‘그리운 내고향’과 ‘아리랑’(2016), 순천시민 6만5000여명과 함께 만든 ‘현충정원’(2018), 6.25전쟁 70주년기념 ‘광화문 아리랑’(2020) 등이 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할 때 유독 숫자에 집착을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 제목엔 유독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8490일간의 기억-한국에서 지낸 23년’(97, 휘트니뮤지엄 필립모리스갤러리전)이라든가, ‘1392개의 달항아리’(구겐하임뮤지엄 소장품), 6만2000개의 그림이 설치된 ‘멀티플 다이얼로그’(2009,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 6만명의 그림을 모은 ‘10만의 꿈’(1999, 파주 통일동산), 120개국 3만4000점을 모자이크한 ‘놀라운 세상’(2001, 유엔 본부) 등.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의 수를 셌어요. 나중엔 멀미가 났어요. 사람들은 내가 소심해서 그렇다고 해요. 그런데 멈출 수가 없어요. 아직도 나는 걸으면서 발자국 숫자를 세고, 탁구 칠 때도 친 횟수를 세고 있어요.”
달항아리와 한글에 대한 사랑
작품의 주 소재로 이용되는 ‘달항아리’와 ‘한글’에 대해서도 그의 사랑은 특별하다. 그 점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달항아리와 한글은 비슷한 게 있어요. 한글이 각각의 모음과 자음이 붙어서 한 소리가 되는 것처럼 달항아리도 위와 아래를 따로 만든 것이 1500℃ 가마를 거치면서 하나가 되잖아요. 너와 나, 동양과 서양, 남과 북, 화합과 세계평화가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그 안에 모두 들어있어요. 더구나 달항아리는 속이 비어있잖아요.”
둘을 하나로 잇는 그의 ‘이음 철학’은 점점 더 개념화되면서 주제를 가진 작품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천만국가정원 안에 설치한 ‘꿈의 다리’가 그렇고, 런던의 템즈강 바지선에 실향민들이 그린 고향 500 작품을 띄워 조명을 설치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그가 간절하게 꿈을 꾸는 것은 남북의 어린이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임진강에 세우고 싶은 ‘꿈의 다리’다.
“그 꿈을 위해 2000년과 2002년 두 차례 평양을 다녀왔지만, 북한 어린이들의 그림을 가지고나올 수가 없었어요. 넓고 긴 강을 건너려면, 오랜 기다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베니스비엔날레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을 모으고 있다. 어린이 그림을 모으는 것은 미래의 시제를 현재로 끌어오는 일로 자신의 평생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탐욕과 전쟁으로 얼룩진 어른의 세계에서 순수한 어린이들의 꿈으로 세계평화를 지키고자 한다.
‘이라크 친구에게 보내는 그림편지’는 이라크의 자이툰도서관 로비에 상설 전시돼 있고, UN본부, G8 정상회담 등에도 어린이들 그림으로 대규모 설치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제 다가오는 10월엔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 앞에 ‘네 개의 신전’을 세울 예정이다. ‘아리랑’ 가사를 한글·영어·아랍어·상형문자 이렇게 네 개의 언어로 각 탑을 덮고, 안에는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을 비롯해 전 세계 아이들의 꿈을 그린 그림으로 채우려 한다.
그가 이렇게 꿈을 찾아 맘껏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부인 마가렛 리(이옥희)씨가 있어서 가능하다. 미술을 전공한 이씨는 1983년 홍익대에 교환학생으로 왔었는데 그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씨는 이제 잘 나가는 변호사로 남편을 후원하고 있다.
“미술은 사람을 연결시키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작가의 임무입니다.”
동심을 지닌 거인, 강익중의 해맑은 눈빛이 고향 청주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강익중은
*1960년 청주에서 출생
*1984년 홍익대 졸업
*1987년 미국 프랫 인스티튜드를 졸업
*1994년 백남준과 〈멀티플 다이얼로그〉전, 휘트니미술관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1998년 퀸즈 플러싱 메인스트릿역 대형 모자이크 벽화
*1999년 ‘20세기 미술작가 120명’선정, 독일 루드비히미술관
*2008~10년 광화문 복원현장 가림막 ‘광화에 뜬 달, 산, 바람’
*2009년 멀티플/다이얼로그∞ 백남준과 강익중, 과천국립현대미술관
*2010년 공공미술 ‘내가 아는 것’,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2013년 순천국제 정원박람회장 ‘꿈의 다리’
*2016년 런던 템즈 페스티벌 ‘집으로 가는 길’
*2018년 순천만 국제정원 <현충정원>
*2020년 광화문 아리랑 야외설치, 광화문
*2021년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꿈의 다리’
*2022년 달이 뜬다 개인전, 갤러리 현대
저서
<모든 것을 던지고 더해라>, <강익중의 내가 아는 것>, <달항아리>, <사루비아>, <고향이 워디여>, <마음이 담긴 물이 잔잔해야 내가 보인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