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나의 힘-출향예술인을 찾아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 베이스 연광철(3)

2024-10-10     동양일보
 
 
 

 

[동양일보]살아있는 교과서 ‘최고의 소리’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요?”

환자의 목 상태를 살펴보던 이비인후과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환자가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의사는 “이런 목 근육은 처음 봅니다. 목 안이 마치 보디빌더의 근육 같습니다”라면서 놀라워했다.

연광철 성악가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진료할 때의 에피소드다. ‘세계적인 베이스’ 연광철은 그렇게 보디빌더의 근육 같은 목으로 노래를 부른다. 목 근육만이 아니다. 그는 공연을 하기 전 무릎 운동을 한다. 다리에 힘을 주고 노래를 불러서, 노래를 부르고 나면 무릎관절이 가장 상한다고 했다. 그렇게 그의 노래는 온몸을 사용하여서 순화되고 정제된 최고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보내고 싶을 때 ‘현존하는’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직지심체요절이 그렇고, 일본의 호류지가 그렇고, 최석정의 수학공식이 그렇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광철의 이름 앞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베이스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갓(God) 광철’, ‘신공(神功)’, ‘살아있는 교과서’, ‘작은 거인’, ‘오페라 무대의 빛나는 보석’, ‘최고의 바그너 가수’ 등 그를 취재하는 언론마다 화려한 수식어들을 붙인다. 그의 노래를 듣거나 그를 만나고 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더 근사한 수식어를 고민할 만큼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공고진학 체계적인 음악공부 못해



연광철. 그를 말할 때면 어린 시절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늘 화제가 된다. 그는 충주시 용탄동에서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마을이었다.

“학교를 가려면 고개를 세 개나 넘어야 했는데 해가 짧은 봄이나 가을에는 집에 갈 때 날이 어두워졌어요. 그때 무서움을 이기려고 노래를 부르며 다녔어요.”

그래서 목청이 트였나보다라고 했다. 충일중에 진학했는데 변성기를 거치면서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갖게 됐다. 음악 시간에 독일 가곡을 처음 들었다. 음악선생님이 슈베르트의 ‘마왕’이나 ‘들장미’ 같은 곡이 있다고 가르쳐주셔서 들어보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레코드 가게에서 음악을 들었어요. 몇 달 걸려 겨우 LP판을 구했지만, 집에 전축이 없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듣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노래를 계속 듣다보니 그 노래들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면서 ‘나도 이 사람들이 하는 노래를 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를 졸업한 뒤엔 빨리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서 충주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공고라선지 고등학교에는 음악선생님이 없었다. 학생들의 정서가 메말라진다고 교내음악경연대회를 딱 한 번 열었는데 그 대회에서 연광철은 가곡 ‘선구자’로 1등을 해 뜻밖의 재능을 알게 됐다.

운명일까 기회일까, 공고학생들은 졸업 전 취업 관련 자격증 시험을 보는데 그는 목표했던 건축설계기능사 자격증 시험에서 탈락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다. 그는 노래가 좋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음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이었다.

대학은 집에서 가깝고 교사 자격증도 받을 수 있는 청주대 음악교육과를 선택했다. 아들의 고민을 들은 아버지는 거금을 들여 선뜻 풍금을 사주셨다. 친구들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연광철은 고3 9월부터 급하게 입시 준비를 했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속성으로 노래를 배우고 밤이면 집에서 풍금을 치며 연습을 하는 등 집중적인 입시 준비 끝에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합격을 하자 아버지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대주셨다.

 

 

주완순교수 사사, 유럽으로 유학



청주대에서 연광철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 준 주완순 교수를 만난다. 주 교수는 음악가로서 그가 갖춰야 할 기본자세를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졸업 후 교사의 길로 갈 것인가 하는 진로 문제로 갈등하는 그에게 비행기삯을 대주며 등 떠밀어 유학을 권유했고, 결혼식 주례도 서준 분이다.

연광철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2015년, 주완순 교수가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실버타운을 찾아 ‘주완순 교수님 사은 음악회’를 열었다. 세계 유명 오페라극장 주역으로 출연 일정이 꽉 차 있는 그가 100명도 안 되는 노 인 관객들 앞에서 은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바친 것이다.

19세 연광철은 평생 은사인 주완순 교수를 사사하며 그렇게 성악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타고난 미성에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의 노래는 곧 청주에서 독보적인 실력으로 이름이 났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하면서도 내가 성악하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하는 것인가 궁금했어요. 콩쿠르를 나간 것은 그런 호기심이었어요. 2학년때 한 국내 콩쿠르에서 1등상인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3학년 때는 국내의 대표적 성악 콩쿠르 3곳에 출전했는데 모두 2등을 했어요.”

학연의 벽이 높은 예술계에서 소위 예술고나 명문 음대 출신이 아닌 지방대 출신이 그것도 국내 대표 콩쿠르 세 곳 모두에서 2등을 했다는 것은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지만, 연광철은 왠지 오기가 생겼다. 좀더 큰 무대에서 진짜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겨뤄보고 싶었다. 주위에서 외국 유학을 권유할 때 결정이 쉬웠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1990년 9월 그는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해준 3000달러를 들고 혈혈단신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예술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불가리아를 택한 것은 가정 형편상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피아국립예술대에 입학, 노래를 하자 레자 콜레바 교수가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독일 베를린국립음대를 연결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을 떠난 지 2년만인 1992년 베를린 국립음대에 입학했다.

베를린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늘 궁금증과 호기심에 파묻혀 지냈다. 어쩌면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은 이러한 궁금증과 호기심 덕인지도 모른다.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노래에 대한 테크닉보다 서양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서 현지 언어를 익히고 역사를 이해하며 공부하느라 고된 생활이 힘겹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그는 유럽에서 활동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부를 마치면 귀국해서 청주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에서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네 실력이면 유럽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도밍고 국제콩쿠르서 대상차지



1993년 그에게 운명같은 일이 벌어진다. 세계 3대 테너의 한 사람인 플라시도 도밍고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성악 콩쿠르를 만들었다. 국제콩쿠르에 걸맞게 유럽 8개국에서 각각 국가별 예선 대회를 거쳐 본선 진출자를 선발한 뒤 본선 대회를 여는 방식을 치러졌다.

“뮌헨에서 열린 독일 예선에 나갔는데 떨어졌어요. 국가별로 4명씩 뽑아 32명이 본선에 진출하는데 스웨덴에서 1명이 출전할 수 없게 돼 나에게 기회가 왔어요. 나는 ‘와일드카드’로 본선에 진출하게 된 거지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본선 대회에서 연광철은 꿈같은 대상을 차지했다.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1996년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의 내한 공연에 함께 무대에 섰다. 도밍고는 ‘세계 오페라 무대의 떠오르는 보석’이라고 연광철을 극찬했다.

그러나 화려한 수상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무대에 설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연광철은 1994년 정식 오디션을 거쳐 280년 전통의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단)에 입단한다. 오로지 실력에 의한 자력의 오페라계 진입이었다.

막상 오페라단이 되고 나서도 쉽지 않았다. 특히 유럽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키(171cm)가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연광철은 포기하지 않았다. 놀라운 집념으로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인처럼 독일어를 익혔으며 노래 연습을 했다. 이때 익힌 독일어 실력으로 연광철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다른 뉘앙스와 억양의 차이까지도 디테일하게 전달할 정도로 실력을 갖췄다.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1999년 ‘악마 로베르’의 주역 베이스를 맡은 이탈리아 성악가가 펑크를 냈어요. 얼떨결에 대타로 출연을 하게 되었어요. 하늘이 준 기회였지요. 나는 최선을 다 했어요. 그 모습에 관객들이 감동을 했나봐요.”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과 독일 비평계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덩치는 작지만 거인 같은 존재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연광철은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가장 낮은 성부인 베이스로서 풍성하고 고급스러운 울림을 인정받으며 오페라의 ‘왕’으로 베를린 국립오페라를 지켜오던 그는 10년이 되던 해인 2004년 독립했다.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로부터 초청이 많아지면서 한 자리에만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악성지 바그너축제 150회 출연



그는 바그너 전문 가수로 유명하다. 작곡가 바그너 음악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연광철은 150회 넘게 무대에 섰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축제기간 내내 바그너 오페라만 공연하는데, 독일어의 뉘앙스를 잘 살려야 하는 특징 때문에 동양인들에게 문턱이 높다. 그러나 연광철은 타고난 음색과 노력으로 바그너 페스티벌에서 세계 최고 기량을 가진 베이스로 인정받고 있다. ‘독일 음악평론계의 황제’라고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는 “바그너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라고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던 그는 2011년 서울대 음대 교수에 임용됐다. 그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한 성악가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정으로 7년 만에 스스로 그 직을 내려놓았다. 이때 아내 박진하(56)씨의 응원이 컸다.

2018년엔 독일 주정부에서 성악가에게 내리는 최고의 영예인 ‘궁정가수’(캄머쟁어·Kammersaenger)의 칭호도 받았다.

그는 여전히 가장 바쁜 현역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국립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런던 로얄오페라, 파리 바스티유, 바이로이트 음악축제,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등에서 베토벤, 베르디, 바그너, 푸치니, 구노, 도니제티, 모차르트 등의 오페라와 음악극을 공연했으며 2025, 2026년까지 이미 스케줄이 꽉 차 있다.

 

그의 주 무대는 유럽이지만 최근들어 국내공연도 활발해져서 2024년 올 3월엔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공연했고, 12월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공연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때 초대돼 애국가를 불렀던 연광철은 “외국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노래를 불렀지만 늘 우리 노래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며 최근 한국 가곡 부르기에 공을 들인다.

한국 가곡을 부를 때면 그는 그 자신이 가곡의 주인이 된다.

‘산에는 꽃이 피네’라고 노래하면 어릴 때 걸어서 다니던 고갯길과 신발이 이슬에 젖던 기억이 떠오르고, ‘산새’라는 시어가 나오면 한국의 새 소리가 친근하게 들리는 듯 하다. 그는 모든 노래는 좋은 소리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믿는 성악가다.

음반매장 풍월당이 지난해 그의 감성 넘치는 노래로, 김순남 작곡의 ‘진달래꽃’(김소월 시), 윤이상 ‘달무리’(박목월 시), 김순애 ‘그대 있음에’(김남조 시) 등을 음반에 담았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라는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 있어요. 독일 가곡 못지않은 예술가곡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한국 가곡을 다시 듣고 다시 불러야 우리도 ‘우리의 시’로 된 ‘우리의 노래’를 갖는 것이지요. 진짜 감동은 시에서 옵니다.”

국내에서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편견을, 해외에서는 동양인이라는 편견을 깬 성악가.

아니, 고향인 충북보다 서울에서, 모국인 대한민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성악가. 연광철.

전 세계 클래식 팬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노래를 통해 시와 문학을 만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 연광철은



*1965년 충북 충주시 용탄동 출생

*1984년 충주공고 졸업, 청주대 음악교육과 입학

*1987년 동아 음악콩쿠르, 중앙 음악콩쿠르 입상

*1990년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예술대 유학, 레자 콜레바 교수 사사

*1992년 독일 베를린국립음대 입학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 우승

*1994~2003년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예술단)단원으로 할동

*1996~현재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 150회 이상 출연

*2000년 오스트리아 문예전문지 ‘세계성악가 베스트 50’에 선정

*2002년 문화관광부 수여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2004∼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탄호이저(바그너)’

*2011~2017년 서울대 음대 교수

*2018년 궁정가수 캄머쟁어(Kammersaenger) 칭호받음

*2023년 한국가곡 첫 음반제작(풍월당)

*2024년 서울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시리즈’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