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나의 힘-출향예술인을 찾아서/ 이석구 한국화가(5)
한국미에 매달린 정통 한국화가...평생 작품의 키워드 ‘생성’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이석구(李錫九 1942~) 화가를 만나면 저절로 옷매무새를 고치게 된다. 교수직(그는 공주대학교 명예교수이다)을 은퇴한 지 이십 년이 가까움에도 외모와 옷차림 말투가 여전히 단정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평생 지녀온 ‘모범생’ 모습이 몸에 배어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였다는 정해일 화가(청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는 “그 친구는 누나들 사이에서 금지옥엽 외아들로 자라서 내가 늘 ‘보디가드’였다”며 “중학교 때 친구 보호한다고 미술반에 따라 들어갔다가 나도 그림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2대 독자라서 어머니로부터 과보호를 받았던 이석구는 몸을 움직이는 일보다 조용히 앉아 만화 보는 것을 즐겼다. “교동초등학교 입학 무렵일 거예요. 2~3살 위인 누나가 학교 교문을 그렸는데 내가 ‘사람이 없으니까 심심하지. 나무를 그리거나 가방 든 아이를 같이 그려야지’ 했어요. 그림을 보면 나도 모르게 직관 같은 게 떠올랐어요.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때부터가 아닌가 싶네요.”
대성중학교에서 미술반에 들었지만, 본격적으로 그림을 전공하게 된 데는 청주상업고등학교에서 김종현 선생을 만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청주상고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미술명문고였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나온 안승각 선생(청주교대 교수로 이직)의 지도로 윤형근 박노수 이서지 등 한국 최고의 작가들이 배출됐다. 이석구가 입학했을 때는 청주상고 1회 졸업생으로 동경제대 미술대를 중퇴한 김종현 선생이 미술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미술반에서 선배 김봉구(조각, 이화여대교수)와 동기 정해일(회화, 청주교육대교수), 박영대(한국화, 백석대석좌교수) 등과 같이 배웠다.
청주상고 진학, 김종현 선생 사사
“김종현 선생님에게 참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선생님은 스포츠 악기연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많은 분이셨는데, 말수는 적으셨지만 제자 사랑이 대단하셨어요. 그림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틈틈이 세계적인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들려주면서 시야를 넓혀 주셨어요.”
이석구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50년대는 전쟁 후 물자가 부족할 때였다. 미술재료를 살 수 있는 곳은 학교주변의 영세한 문방구점이 고작이었다. 김종현 선생은 비싼 일제 물감을 사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미술재료들을 직접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버드나무를 깡통에 넣고 구워서 목탄을 만들고 부족한 유화물감 대신 안료를 콩기름에 개서 쓰는 방법은 신기했다. 캔버스는 마대자루나 천막천을 이용했다. 그래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즐거웠다.
여름방학 때는 김종현 선생 지도로 미술반 전원이 속리산에 가서 합숙을 하며 스케치를 했고, 청주시내 고등학교 미술반 학생들과 자발적으로 모여 청주시 탑동의 양관을 사생하는 행사도 열었다.
“화판과 화구통, 이젤을 들고 거리에 나가면 우쭐했어요. 고등학생임에도 전시회도 많이 열었어요. 전시장이 없어서 학교강당이나 현관, 복도, 도청옆 상공장려관, 시청회의실, 심지어는 다방에서도 열었어요. 등사기로 리플렛을 만들어 돌리면서도 열정들이 대단했던 시절이었어요. 추억이 서린 청주시내 거리거리, 우암산과 무심천...지금도 그리운, 참 아름다웠던 청년시절이었어요.”
고등학교때 자신이 그린 신흥제분의 ‘사자표 밀가루’ 디자인이 상품화됐던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 밀가루 디자인은 당시 신흥제분 상무였던 아버지(이경완)의 부탁으로 그렸다.
이석구는 그와 같은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29회 국전에서 ‘대상’ 차지
홍익대 미대 진학은 미술학도들에겐 정해진 엘리트 코스였다. 그는 홍익대 진학을 한 뒤 동양화(한국화)를 택한다. 그가 동양화를 택한 것은 고향의 아침 풍경과 무관하지 않다. 청주시 우암동 27번지의 집에서 청주상고를 가는 길목에 감나무밭이 있었는데, 초가을 아침 안개 사이로 붉게 익어가는 감이 서정적으로 보였고 그런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대학 1학년때 청전 이상범 교수에게 수묵화를 배운 것도 선택에 도움이 됐다. 그의 대학생활은 모범적이었으며 새로운 것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 스펀지로 물감을 빨아들이듯 배웠다.
일본에서 공부한 조복순, 천경자 교수에게 기초적인 재료학과 색채에 대해 배우고 물감 사용 방법을 기초부터 익혔다. 분채를 주발에 갈아 아교 물에 개서 종이에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 반수가 된다. 백반을 찬물에 녹여 아교 물과 섞어서 종이를 반수로 한 뒤, 물감가루로 채색하는 작업도 배웠다. 조개껍질 호분은 하얀 물감으로 사용했다.
전통적인 수묵산수와 색채를 마음대로 다룰 줄 알게 되자 창작의욕이 생겼다.
이석구는 대학 2학년 때 당시로서는 유일한 화가 등용문인 국전(1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자학’이라는 작품으로 입선을 한다. 2년 선배인 청주사범 출신 김영길과 같이 숙식을 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김영길에겐 이석구가 모델이 되어주고, 이석구는 김종현 선생에게 바이올린을 빌려서 소품 재료로 사용했다. 그 그림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입선을 했다. 4학년 때는 ‘파초’로 특선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잔영’으로 대한민국 최고권위인 29회 국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초 입선을 한 지 약 20년 만의 일이었다.
세계여행 통해 한국적 ‘정체성’ 확인
이 상의 수혜로 그는 문예진흥원의 후원을 받아 다른 분야 대상 수상자들과 함께 두 달반 동안 세계일주여행을 떠난다. 1980년도의 일이니 해외여행을 떠나려면 반공교육을 받아야 할 때였다. 어렵게 나선 길이라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가보고 싶은 나라들을 다 가보았고, 루브르, 스미소니언 등 유명 미술관도 다 둘러보았다. 주유천하 하듯 이 나라 저 나라를 넘나들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과 시야가 넓어졌다. 그러나 해외여행은 단순한 풍물기행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나갈 방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가 국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잔영’은 전각의 모티브를 기하학적으로 활용한 비구상 작품이었다. 그 무렵 그는 한국전통의 생활문양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해외여행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한국적 정체성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이석구는 학창시절부터 착실하게 기초과정을 다진 성실한 작가였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인물, 산수, 화조 등 수묵채색화의 다양한 장르를 골고루 섭렵하면서 사실과 구상작업을 튼실하게 했다. 그의 그림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였다. 사실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추상으로 전환했다.
“떡살무늬, 격자무늬, 완자문양, 그리고 소박한 목가구와 장신구 등 조상들이 사용했던 서민적인 생활용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어요.”
그는 ‘잔영’ ‘잔형’ ‘흔적’시리즈를 통해 조상의 얼과 혼이 스민 전통미를 화폭에 농축시켰다.
전각의 모티브, 신라 칠기 표면의 붉은 색, 그 위에 그려진 기마인물도의 이미지, 금관과 귀걸이의 장식, 진묘수(鎭墓獸), 벽화, 벽돌의 문양 등 백제 고분미술의 다양한 요소들이 작품에 수렴됐다. 또 기법도 거친 질감의 표현에 주력해 고색창연한 시각 효과도 냈다.
이런 소재에 천착하게 된 것은 그가 백제의 고도인 공주에서 생활했던 영향도 있다. 그는 경남대 교수(1978~1981년)를 거쳐 1981년부터 2007년 퇴직할 때까지 공주대 교수로 근무했다. 2001년엔 한국예총 공주지부장을 맡아 예술제를 치르기도 했다.
끊임없이 변모... 삶을 그리는 작가
미술과 관련한 사회활동도 열심히 했다. 신수회 회장을 두 차례 맡아 한국화가들의 활동을 도왔으며 한국화, 문인화가를 키우기 위해 안견미술대전을 창립해 운영과 심사에 참여했다. 또 충남한국화회 회장과 재경충북작가회장을 맡아 봉사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의 작품은 한 번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모했다. 마치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오르듯, 의식의 흐름처럼 그림에 자신의 색깔을 입히며 변화했다. 1990년대 흔적시리즈로 맑고 정갈하게 바뀐 그의 그림은 2000년을 기점으로 또다시 변모한다.
산, 구름, 꽃, 달 들 구체적 형상을 지닌 요소들이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록달록하고 완만한 산들, 하늘 위로 유유히 떠가는 구름, 구름은 때론 당초무늬로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비. 마치 아름다운 동화를 보듯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림들이다. 생략하고 단순화시켜 더욱 정갈해진 이 그림들에 그는 생성(生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생성’은 이석구가 평생 매달린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당초무늬와 구름을 합해서 ‘운당초’라고 내가 그냥 지었어요. 이 무늬는 사실은 아라베스크 문양인데 중국으로 들어간 뒤 당나라풀이라 불렸고, 우리도 따라서 당초라고 부르는 것이죠. 고구려 벽화에도 당초무늬가 나와요. 나는 운당초를 하나하나 사람처럼 생각했어요. 구름처럼 철새처럼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가운데 치열한 경쟁과 사랑, 애증의 관계가 생기지만 세상사에서,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렇게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고 순환되는 가운데 또 다른 새로움이 잉태되지요. 내 그림 생성시리즈는 바로 그런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거예요.”
지난해 말 이석구는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초대로 <생성의 미학: 이석구의 작품세계>라는 전시를 열었다. 60년이 넘는 화업을 정리하는 전시회였다. 발표순으로 정리한 도록도 새로 만들었다. 도록은 그의 발자취를 시대별로 한눈에 보여준다. 그러나 그 모든 그림이 표현방식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주제는 달라진 적이 없다.
이제 80 고개를 넘고 나니 지난 일들이 모두 그립다. 문학을 좋아하던 명구누나와 남매전으로 시화전을 연 일, 청주의 대학생 모임인 새벽문학회 시화전에 정해일, 이구민과 앙가주망으로 맘껏 그림을 그려준 일, 변상봉 후배와 같이 지내며 밤새 그림 토론을 하던 일, 고등학교 은사였던 이설우 선생으로부터 ‘이석’이라는 아호를 받은 일...그러다가 최근 요양원으로 옮긴, 치매를 앓는 아내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젖어든다.
정통 한국화 화가 이석구. 평생 그림을 떠나 산 적이 없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삶’을 말하기 위해 그는 다시 붓을 잡는다.
이석구(李錫九)는
1942 서울 출생
1949 청주교동초입학, 서울, 괴산명덕, 중앙초, 대성중 졸업
1957 청주상고 미술반에서 김종현 선생 사사
196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동양화 전공) 입학
1961 제10회 국전 ‘자학’ 입선
1963 제12회 국전에 ‘파초’특선
196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동양화 전공) 졸업
1978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미술교육 전공) 졸업
1978-1981 경남대학교 조교수
1980 제29회 국전에 ‘잔영’으로 대상 수상
2개월여 해외일주 미술계 시찰
1981-2007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1983 충남 한국화협회 창립 회장
1984 신수회 회장
1985 ‘85 salon des Artistes Francias’ 한국 특별전 금상
1993 재경충북작가회 회장
1996 안견미술상
2001 한국예총공주지부 회장
2007 황조 근정 훈장
현재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전시
개인전 12회 및 단체전 다수
<사진설명>
1. 프로필
2. 공주대 교수 재직시절
3. 귀향열차 1962
4. 생성生成 10-7 2010
5. 생성生成 15-3 2015
6. 흔적痕迹 92-4 1992
7. 흔적痕迹 86-7 1986
8. 산 1980
9. 작업모습
10. 청주상고미술반 속리산 스케치여행 앞줄가운데가 김종현 선생
11. 생성을 그린 도자기
12. 작업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