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나의 힘-출향예술인을 찾아서/이길원 전 PEN한국본부이사장(6)

2024-10-31     유영선
대한민국문화상 수상
이길원 시인 저서
이길원 시인 저서
78차 국제PEN대회 당시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78차 국제PEN 대회 인사말
이길원 시인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이길원(李吉遠. 1944~ ) 전 국제PEN한국본부이사장은 요즘 감회가 새롭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세계가 한국문학을 인정했다는 것이 실감나기 때문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국제PEN대회에 가면 외국 작가들이 ‘한국은 무슨 말을 쓰냐? 중국어를 쓰냐? 일본어를 쓰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세종대왕부터 설명을 해야 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10여 차례 이상 국제PEN대회에 참가하면서 한국문학을 알리기에 무던히 애썼다.

그가 한국인 최초로 국제펜클럽 본부 이사에 도전하고, 한국본부이사장으로 국제PEN대회를 유치한 것은 한국의 문학과 문인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국제펜클럽은 1921년 영국 런던에서 창립됐어요. 문학의 증진, 표현의 자유 수호, 범세계적 작가공동체 구성을 목표로 114개국에 143개 본부를 두고 10만여 명의 문인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문학단체입니다. 한국은 1954년 가입해 세계 문학계와 교류하고 있지요.”

그가 이사장이던 2012년, 78차 국제PEN대회를 경주시에서 개최했다. 100여개가 넘는 나라에서 문인 1000여 명이 한국을 찾았다. 프랑스의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3명이나 참가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3분의 1이 펜클럽 회원이고, 각국 펜클럽 본부장들이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권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의 한국방문은 한국문학을 알리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그는 ‘한글과 한국문학’이라는 비디오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이제 더 이상 외국작가들이 ‘한국은 무슨 말을 쓰느냐?’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한글을 배우고자 한다. 올해 국제펜한국본부는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해 70년사를 엮었다.



시낭송회 따라다니던 풋풋한 시절



이길원은 청주시 내수읍 은곡리 97번지에서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이인찬(대통령표창 222950호. 그의 아버지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청주지역에서 전단을 뿌리고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던 학생운동 주모자였다)과 어머니 유임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말 일본의 무자비한 공출로 숟가락 하나 남기지 못하던 1944년 3월 9일이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해 태어난 아이가 비실비실하자 출생 신고를 미뤘다가 이듬해에 했다.

내수초등학교에 4월에 입학을 했는데, 두 달 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아버지 등에 업혀 피난 길에 올라 전쟁 속에서 1학년을 보내고 2학년 때까지도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그렇게 다닌 초등학교에서 우등상을 받아 오자 어머니는 ‘죽을 줄 알았던 아이가 상을 받아 왔다’며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5학년 때는 잡지 <새벗>에 동시 ‘피난길’이 뽑혀서 상과 함께 1년치 구독료로 받아 집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중학교는 청주중학교로 진학했다. 입시제라서 시골에선 1등 하는 사람 정도나 갈 수 있던 학교였다. 그런데 내수초등학교에서 9명이 한꺼번에 합격을 해서 잔치가 벌어졌다. 중학생이 된 후 갑자기 음악에 꽂혔다. 길을 가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서 들어가 물어보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이라고 했다.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계집애처럼 무슨 피아노냐. 과학자가 되어야 한다”며 반대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유성기와 레코드판을 사다주며 음악과 가까이 하는 것을 막지는 않으셨다.

“그때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것이 평생 아쉬워요. 늘 음악에 갈증을 느끼며 살았어요. 음악을 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시인이 아니라 작곡가가 되었을 거예요.”

청주고등학교 시절은 풋풋한 문학소년이었다. 시집이라도 한 권쯤 옆에 끼고 팝송이라도 흥얼거려야 멋있어 보이던 그 시절, 생각해 보면 요즘 학생들보다 낭만이 있고 인문학적 소양이 있었던 학창시절이었다.

“청주에는 청주고 청주여고생들이 중심이 된 ‘푸른문’이라는 고교생 연합 문학서클이 있었어요. 누나 이문옥이 푸른문 회원이어서 중학교 때부터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따라다니다가 나도 가입했어요. 푸른문 선배 회원으로는 동국대 총장을 지낸 평론가 홍기삼, 소설가 김문수 등이 생각나네요. 나의 문학적 소양은 아마도 그 무렵 자란 듯 싶어요. 교과서에 실린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소설에 가슴 절이며,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유신말기 필화로 잡지사 퇴사



그러나 이길원은 문학에 대한 꿈을 접고 아버지의 소망대로 연세대학교 화학과로 진학한다. 서울의 대학은 그에게 신세계였다. 관심 가는 일도 많았고 공부보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운동을 좋아하던 그는 펜싱부에 들어가 학교 대표 선수가 되어, 46회 전국체전에서 ‘사브르’ 종목에 금메달을 따기도 하고, 학보사 기자로 신문 만드는 일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또 학생들의 복지에도 관심이 많아 이공대학 학생회장이 된다.

그가 대학생이던 시절은 5공 시절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유신개헌 반대’ 데모에 나섰다가 경찰에 체포, 구금이 되었다. 그 데모 전력으로 인생의 항로가 바뀌게 된다.

“대학 졸업후 취직이 안되는 거예요. ‘요주의 인물’로 지목이 된 거죠. 그때 입사한 곳이 잡지사 <주부생활> 편집국이었어요. 원래는 조경철 박사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로 데려가겠다고 이력서를 가져갔는데, 그분이 그만두면서 내 이력서를 주부생활로 보낸 거예요. 영어와 작문 등 세 과목 시험에서 1등을 했는데, 이곳에서도 데모 전력이 문제가 되었었나 봐요. 다행히 이종화라는 고등학교 동기가 총무부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입사를 하게 되었지요. 주부생활로 출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문수 소설가가 찾아와서 ‘원고지 중독되면 떠나기 어렵다. 가난하게 살 자신 없으면 네 길을 찾아가라’고 말렸어요. 그런데 갈 곳이 없어서 그대로 머물렀지요. 당시 주부생활 편집국은 이름을 날리던 문인으로 가득했어요. 강민 편집국장과 구혜영 소설가, 박제천 시인, 민영 시인 등 그들 속에서 일하며 나도 시인 같았어요.”

잡지사에 근무하는 동안 추천을 받아 시인이 될 기회가 많았지만 그는 시인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편집일에만 열중해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을 두 번째로 바꾸는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신년호를 만들면서 ‘아직도 어둠이’라는 권두시를 실은 게 말썽이 되었다. 햇빛이 비추는 사진 곁에 ‘지금 어두워도, 지금 구름이 끼어도, 구름의 뒤에는 해가 빛난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가면, 그 태양은 바로 우리 어깨를 비출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편집장인 그가 직접 써 넣은 것이다. 당시는 유신정권 후기로 모든 출판물에 대해 군 검열이 있던 때였다. 신년시 외에도 탄광기사 등에 대해 불온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책은 인쇄되지 못했고, 사표를 내는 조건으로 구속을 면했다.

잡지사를 나오자 먹고 살 일을 찾아야 했다. 1977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국산 소형 스티커 인쇄기 한 대를 구비해 인쇄소를 시작했다. 산업용 포장이나 라벨 인쇄를 하는 특수인쇄였다. 몸에 밴 성실성과 충청도 사람 특유의 끈기로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시작한 ㈜태평양 그랜드는 각종 특허 기술 갖춘 전문업체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직장에서 몰아낸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에 편승해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늦은 등단...각종 문학상 수상



10여 년 만에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들로 개인 시집을 내려 하는데 문덕수 시인이 ‘등단은 언제 했냐?’고 묻더니 <시문학>으로 연결해 주었다. 그 기회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영영 등단을 하지 않은 채 시를 썼을 것이다.

그가 문단에 얼굴을 내밀자 오랜 문인 친구들이 “어디 숨어 있다가 나왔느냐?”며 반갑게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기업주로 그래도 주머니 사정이 나은 편이라서 가난한 문인들의 술값을 자주 부담해 주며 문인들과 교류를 이었다. 펜클럽과 인연이 된 것은 그때였다. 한국본부 회장이던 문덕수 시인이 국제PEN총회에 참석하는 대표단을 수발할 젊은이가 필요하다며 그를 이사로 임명한 것이다.

1993년부터 한국대표단을 보좌하며 매년 국제PEN대회에 참가했다. 국제PEN에서 한국문학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과 한국에 대한 이해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실질적 의사결정기구인 ‘국제 PEN이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에서 선출직 이사는 단 7명. 2010년 임기 만료된 4명의 이사를 뽑는 선거가 <동경 국제 PEN 총회>에서 열려 입후보했다. 무려 16명이 후보로 등록한 선거에서 영어로 후보자의 변을 발표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한 끝에 이길원은 마침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PEN의 이사가 되었다. 2012년 국제PEN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기까지엔 그런 노력과 그의 역할이 있었다.

덕분에 시도 열심히 써서 <하회탈 자화상>, <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 <어느 아침 나무가 되어>, <꽃을 심는 손>, <복수초> 등 시집과 영역시집, 불역시집, 헝가리역시집을 펴내고, ‘천상병 시상’, ‘윤동주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서울시 문화상’ 등도 탔다.



우암 송시열 서한문 출간 계획



요즘 그의 생활은 거의 루틴으로 이뤄진다.

새벽 4~5시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시를 쓴다. 그리고 점심무렵 목동아파트 자택을 나와 문인이나 지인을 만난 후 오후 2~3시쯤이면 어김없이 파주시에 있는 회사로 간다. 회사는 장남에게 맡겼지만, 꼭 가는 것은 플루트를 불기 위해서다. 그는 6년째 플루트를 배우고 있다. 플루트 연습은 코로나 시절에도 멈추지 않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곡을 주로 부는데, 은색 악기에서 청아한 소리가 날 때면 세상 근심이 사라진다.

또 하나 그가 요즘 새롭게 매달리고 있는 일은 송시열의 서한문을 책으로 내는 일이다. 조선시대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한산 이씨 집안의 사위로 장인 처남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그의 집안에서 보관해 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서한문들을 사비를 들여서 국내 한문학자 6명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이제 책이 나오면 시를 쓰는 후손으로서, 그에게 글 쓰는 즐거움을 물려준 아버지와 선조들에게 할 일을 한 것 같아 떳떳할 듯 하다.

“하느님 가까이 구름에 머물며/ 빈 마음으로 세상천지 굽어보다가/ 어느 봄날 진달래 피우던 비가 되다가/ 풀잎이나 나무들 혈관 속을 흐르다가/ 땅 속에 스며들어 또 천 년/ 어느 날 플라스틱 병에 담겨/ 이 아침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이길원 시 ‘생수’ 중 일부”





이길원(李吉遠)은



1944년 청주시 내수읍 은곡리 27에서 출생

내수초-청주중-청주고 졸업

1964년 연세대 화학과 입학

1964년 제64차 전국체전 펜싱 사브르 금메달.

1968년 연세대 이공대학 학생회장 선출

1970년 <주부생활>편집국 입사.

1977년 유신 후기 필화로 퇴사.

1977년 특수인쇄사 ‘태평양그랜드’설립

1991년 <시문학>으로 등단

2009년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장 선출

2010년 국제PEN 세계본부 이사 선출

2010년 불역시집 La revière du crépuscule 출간

2012년 제78차 국제PEN총회 개최(경주시)

2013년 국제PEN 세계본부 이사 재선

2009년~ <펜문학> 발행인 겸 편집인



*시집: ‘하회탈 자화상’, ‘은행 몇 알에 대한 명상’, ‘계란껍질에 앉아서’, ‘어느 아침, 나무가 되어’, ‘헤이리 시편’ 외 영역시집 등

*수상: 제5회 천상병문학상, 제24회 윤동주문학상, 제4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