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수줍은 천사화

오영환 수필가

2024-11-03     동양일보
오영환 수필가

[동양일보]만추의 계절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나 보다. 며칠 후면 겨울을 알리는 입동의 절기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 패딩잠바를 입고 집을 나서니 찬바람이 옷깃으로 숭숭 들어와 을씨년스럽다. 자원봉사학교 교문을 들어서니 울타리의 노오란 천사화(天使花)가 고개를 푸욱 숙이고 수줍은 듯 나를 반긴다. 그러면서 선생님과 학생들의 시선을 멈추게 한다.

천사화는 수줍은 듯, 늘 아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겸손한 꽃이다. 그것도 여러 송이가 한데 어우러져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옛 고향에 온 느낌이다. 마치 음악인이 연주하는 색소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목이 긴 백로를 닮은 것 같기도 하여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교문 밖 사람들은 천사화 꽃을 힐끔 쳐다보고는 무관심으로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그만큼 매력이 없다고 느껴지는가 보다.

그러면서 멀리 떨어진 빠알간 국화꽃에 다가가 예뻐하며 사진도 찍고 사랑을 속삭인다. 그걸로 보면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한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나도 마찬가지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끔 천사화가 애처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관심 없는 박토에서 혼자 쓸쓸히 태어나 묵묵히 자라고 꽃을 피우니 말이다. 이 얼마나 외로운 삶인가.

하지만 천사화 꽃은 그 향 내음을 멀리까지 토해내며 꿀벌에게 손짓을 한다. 가까이 다가와 후손을 챙겨달라고 말이다. 어쩌다 모여든 꿀벌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꿀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 씨앗을 영글게 해준다. 이것이 바로 대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이뿐인가. 천사화 꽃은, 우아하고 소박하며 겸손의 이미지를 맘껏 뿜어낸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항상 고개를 숙이고 산다.

겨울철은 냉랭한 기운으로 조금 쉬었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또 꽃을 피운다. 여러해살이꽃으로 근기(根氣)가 넘쳐나는 꽃인가 보다. 이뿐인가. 천사화 꽃은 산새들이 살아갈 보금자리 둥지도 만들어 선물로 내어주니 이 얼마나 고마운 꽃인가.

요즘 정치지도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아니 내일도 당리당략과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겸양지덕’을 버린 지 오래다. 국민은 늘 뒷전이다. 우리 정치의 일면(一面)을 보는 것 같아 마음도 씁쓸해진다. 이분들께 한 송이 천사화 꽃을 가슴에 달아주고 겸손을 배우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분명 살기 좋은 세상이 성큼 다가올 것 같다. 울타리의 천사화 꽃에 푸욱 빠져 넋을 놓고 있을 때 저녁노을은 설핏이 기울며 어둠을 드리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송이 천사화 꽃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으니 ‘수줍은 향 내음’이 방안가득 스며드는 것 같아 마음도 넉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