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가족
오영환 수필가
[동양일보]오래전 형님의 뒤를 이어 초등교사가 되었다. 집을 떠나 멀리서 하숙을 하고. 토요일은 어머니가 그리워 고향 집을 서둘러 찾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나절이 되었고 굴뚝에서는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기다리던 어머니는 “우리 막내아들 왔네”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초롱불을 켜놓고 학교 이야기꽃을 피우면 어느새 밤은 깊어진다. 이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로 들어가 어머니 품에 안기어 잠을 잤다. 막내둥이 티가 유별났나 보다. 지금 젊은이 같으면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다 큰 아들이 엄마 품에 안겨 잠을 자다니···
몇 년 후, 결혼을 하니 주거문화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조금씩 변화가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점점 쇠약해지시더니 노환으로 끝내 돌아가셨다.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슬픔이 다가왔다. 결혼 후,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한번은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자전거 뒤에 모시고 읍내 병원을 찾아 주사와 약을 타온 것이 효도의 전부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선산에 모시는 날이다. 어머니의 관을 붙들고 놓질 않아 하관식 下官式이 30분이나 지연되었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의 관이 광중 壙中으로 모셔지며 삼베옷을 입은 어머니 가슴위로 한 삽, 두 삽의 흙이 뿌려질 때는 관을 잡고 매달리며 슬피 울었다.
사랑했던 어머니가 영원히 잠들 곳이라 생각하니 억장 億丈이 무너진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가지 마세요.” 라고 불러도 소용이 없다. 마지막 가시는 어머니께 잔을 올리니 술잔이 흔들리며 엎질러진다. 굵은 눈물이 돗자리로 뚝뚝 떨어지며 얼룩도 진다. 선산은 온통 검은색 상복의 물결로 뒤덮였다. 여러 날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슬픔에 젖어 방황을 하며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장지에서의 슬픔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딸과 사위 사이의 편차는 은연중 다르다는 느낌으로 마음도 서걱거린다.
민법에 의하면 부모를 기준으로 아들과 딸은 자녀이고 직계 친족이다. 하지만 며느리는 자부이고 사위는 서 壻이며 가족이다. 이렇듯 아들과 딸은 혈육으로 맺어진 친족이고 며느리와 사위는 법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자녀는 함께 살든 멀리 살든 곱든 밉든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혈육이다. 하지만 며느리와 사위는 경우에 따라서는 남남이 될 수도 있다. 이래서 장지에서의 슬픔은 혈육의 정과 법의 정 사이를 오갔나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30여 년이 다 되어간다. 모처럼 동짓날을 맞아 어머니 산소를 찾아 막걸리를 잔에 부어 놓고 절을 하며 “어머니! 막내아들 왔어요.”라고 말씀드려도 답이 없으시다. 오직 먼 산의 부엉이만 슬피 운다. 이제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아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이래서 나는 뒤늦게 철이 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