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나를 바로 보는 일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나를 바로 보는 일은 어렵다. 내가 곧 바라보는 주체이면서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바로 보지 못하면, 자칫 무모한 일에 뛰어들거나 자만심을 보여 남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점차 평판이 나빠지고, 그렇게 나빠진 평판은 다시 자신의 자존감을 건드려 불안과 우울감을 불러낸다.
요하임 바우어(J. Bauer) 같은 뇌과학자들은 아기는 스스로를 자신으로 받아들일 능력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톱으로 얼굴을 긁고서도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엄마 같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타인과 몸으로 교류하면서 점차 자신과 그를 구분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자아를 ‘최소 자아’ 또는 ‘대롱의 자아’라고 부른다. 작은 대롱 같은 자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작지만 의미 있는 창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최소 자아는 다시 세상과 만나는 폭과 넓이가 커지면서 자라나 삶과 세상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이 자아를 ‘서사 자아’ 또는 ‘이야기하는 자아’라고 부른다. 우리가 유전자 수준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동물들과 차별화되는 수준이 바로 이 자아에서 확보된다. 자신의 삶을 세상과 연결 지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이기적인 판단과 함께 도덕적인 판단이나 미적인 판단도 할 수 있게 된다. 문화적이고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을 각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이야기는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는다. 때로 거짓말을 하게 되고 사나운 말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인터넷 기반의 사회연결망 서비스가 휴대전화를 통해 대다수의 일상에 자리한 후로는, 가짜뉴스와 비난 댓글들이 빠른 속도로 전파돼 많은 사람의 정신을 황폐화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뉴스나 사람만 찾아서 제공해 주는 알고리즘이 작동하면서 스스로의 편견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확증편향을 일반화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민들은 생각이 다른 시민을 쉽게 적으로 내모는 일에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그것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거나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목받으면서, 이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정치인이나 지식인을 찾는 일이 정말 어렵게 됐다. 우리나라 양대 정당의 극단적인 대립은 말할 것도 없고, 도널드 트럼프로 상징되는 미국이나 신나치 정당 같은 극우 정당이 발호하는 독일이나 프랑스도 전혀 나을 것이 없다.
어떻게 해야 이 깊은 수렁으로부터 삐져나올 수 있을까. 먼저 이런 곤혹스런 상황에 처한 자신과 우리 사회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주인공인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우리 모두는 이런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철학함 역량이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내야 하는 철학함은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거리두기’에서 시작된다. 일단 거리를 확보할 수 있으면, 자신의 내면과 우리 사회를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나는 이렇게 자신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자아를 ‘명상 자아’라고 부르려고 한다. 명상(冥想)은 주로 불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제는 종교를 초월하여 누구나 사용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명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자 자신이 속한 사회와 세계를 공정하게 인식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렇게 인식할 수 있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실천도 어렵지 않게 된다.
대통령 윤석열과 주변 권력자들이 벌인 비상계엄 사태는 새해를 맞아서도 탄핵 국면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고통을 불러내고 있다. 눈이 내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탄핵 찬성과 반대를 외치는 동료 시민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고통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여전히 극우 유투버와 술에 젖어 산다는 대통령에게 기대하기 어렵다면,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연대하며 문제를 해소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그 출발은 자신과 사회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고자 하는 ‘명상 자아의 확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