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덜 익은 선진 민주국가의 필연적 운명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느닷없는 12.3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우리나라의 정치적 위기상황은 탄핵, 내란, 체포, 구금, 구속 등 온갖 험한 언어들의 난무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다. 탄핵 정국의 와중이던 지난해 12월 29일에는 무안공항에 동체착륙을 시도하던 방콕발 제주항공 2216편이 폭발하면서 탑승객 181명 중 179명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사고가 일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지난해 끝자락에 두 번에 걸쳐 커다란 비극을 겪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번번이 거대 야당의 벽에 부딪히며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비상계엄이란 극약처방에 손을 대고 말았다. 군(軍)의 존재 이유와 비상계엄의 의미에 대해 몰상식한 대통령이 저지른 반민주적 폭거였으며, 부끄러운 현대사의 한 장면이었다. 권력의 무게가 커질수록 그 권력의 사용에는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절제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무시해버린 결과다. 비상계엄 선포가 반민주적 폭거이기에 이를 수습하는 과정만은 품격있고 민주적이어야 하는데, 이를 집권의 호재로 여겨 오로지 몰아붙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거대 야당의 행태 또한 분명 비민주적이다.
무안공항의 제주항공 참사는 또 어떤가? 제주항공 2216편은 동체착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 구조물과 충돌하면서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항 내에서의 장비나 설치물은 부러지기 쉬운 받침대에 장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러지기 쉬운 받침대’를 설치하라는 규정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무지와 무관심의 소치이며, 아직도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는 안전의식이 빚어낸 필연적 참사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으며, 일사천리로 세계화까지 진행시켜 당당히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민주국가는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민주화가 완성됐다고 믿었다. 또한, 고속성장으로 급격히 늘어난 국민소득만 보면서 선진국이라는 환상에 빠져 선진국과 선진국민이 갖추고 지켜야 할 기본 가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으며,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민주주의가 완성되기 위해, 진정 선진국이기 되기 위해 채워야 할 빈 곳들이 너무나 많고 가꾸고 다듬어야 할 어린 나무들이 즐비하다. 민주주의의 빈 곳에서 비상계엄에 대한 유혹이 싹을 틔웠고, 선진국의 그늘에서 무안공항 참사가 빚어진 것이다.
정치권은 반복되는 정치적 비극의 원인을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며 권력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열을 올리고 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양당제마저 엉망진창으로 만든 사람들이 어떻게 다당제를 꾸릴 수 있겠는가? 정치하는 사람의 사고체계가 민주적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어떤 제도를 도입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경제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는 우리 경제도 그늘진 곳, 비어있는 곳을 찾아 고치고 채우는 데 눈을 돌려야 한다. 정치의 권력 구조 만큼 개선이 필요한 것이 기업의 지배구조다. 민주적인 선진 경영체제라면 개발도상국처럼 재벌 3세, 4세까지 내려가면서 대대손손 소유와 경영을 독점하진 않을 것이다. 경제도 경영도 그리고 기업도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민주적인 국민만이 민주적인 정치, 민주적인 경제,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고 감시하며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민주적인 국민은 가정과 사회에서의 교육과 훈련으로 성장한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단위다. 가족 구성원 간의 민주적인 소통과 의사결정 방식은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근본이 된다. 민주적으로 훈련되고 무장된 가정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원리요 절차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범국가적, 범국민적 교육과 홍보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적이지 못한 국민은 반민주와 비민주를 감시할 능력이 없으므로 전체주의, 독재, 포퓰리즘의 쉬운 먹잇감이 되고 만다. 가정과 학교에서 민주주의가 몸에 배지 않으면 또 다른 계엄사태를 겪게 될 것이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반복되는 후진국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