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다시 봄을 기다리며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2월의 하늘이 유난히 흐리고 차갑다. 마지막 겨울한파가 왔다가 물러나면 어김없이 반갑지 않은 미세먼지가 눈 앞을 가리곤 한다. 이제 웬만한 수치에는 놀라지 않을 만큼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꺼림직함까지 떨쳐내지는 못한다.
나라 밖에서는 오랜 우방 관계인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가 관세정책을 통해 노골적인 통상압력과 안보비용 압박을 예고하고 있고, 몇 년째 지속되는 전쟁들도 끝날 듯 끝나지 않아 답답함을 더하고 있다. 나라 안 사정은 더하다. 대통령 탄핵과 그 결과로 이어질 대선을 놓고 객관적이고 중도적인 시선보다는 극단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주로 들려와 나라가 곧 큰 대립의 장으로 끌려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우려까지 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맞았던 20세기는 늘 이런 두려움과 함께 가슴이 터질 듯한 환호를 번가르며 다가왔다. 120년 전 올해와 같은 을사년에는 이토오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황후까지 살해하는 극악무도함을 내세우며 강요한 을사늑약이 있었다. 그것이 세계사적으로는 근대로 편입되는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북분단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다시 동족상잔이라는 외세에 의한 내전으로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우리 20세기는 격변의 역사를 썼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운동인 3.1을 이끈 것은 천도교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외치면서 19세기 중반 수운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東學)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극복한 새로운 종교로 다가와 백성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집권층에 의해 동학란이라고 불린 충돌이 더 비극적인 사태로 끝난 것은 일본군과 같은 외세의 개입 때문이었다.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동학군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했던 관료의 타협적인 대응책은 사라지고, 지도자 김개남과 전봉준은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백성의 마음을 읽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곧 하늘이어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시대정신에도 주체적으로 부응했던 동학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을 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최대의 종교가 되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삼아 3,1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거기에 비교적 소수 종교에 속했던 감리교 중심의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고 불교는 급속한 친일로 전환하는 가운데서도 만해 한용운과 용성진종이라는 걸출한 두 지도자가 주도하여 힘을 더했다. 가톨릭은 당시 프랑스인 주교의 명령으로 참여하지 않았는데, 프랑스도 일본과 입장이 다르지 않은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여 년을 보내고 맞은 2025년은 밝지 못하다.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근거와 이유를 우리는 함께 마련해 왔다. 대한제국기에 토대를 쌓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강하게 뿌리를 내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시민들이 그 첫 번째 근거이다. 잘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교육과 연결지어 개인적 성공은 물론 국가적 성공으로 이끈 나라를 우리는 만들어냈다. 희망의 두 번째 근거는 100년 동안의 비극과 성취의 함성을 문화적으로 융합해 내는 데 성공한 한국문화(K-Culture)의 힘이다. 노래에서 춤, 영화, 클래식으로 영역을 확장하더니 드디어 작년 말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지며 이정표를 찍었다.
물론 이런 성취 앞에서 우리는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당해온 비교와 차별을 자칫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야만적인 행태를 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 우리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다는 엄연한 사실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은 문제가 있다면 내면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 사회를 관용과 타협의 민주사회로 만들어내고자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 자신과 사회의 모습이 곧 세계적인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연결망을 통해 동시에 생중계되는 시대를 살고 있고, 그만큼 우리가 주목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속에서도 산책길 연홍빛 진달래가 피어나고 인문관 앞 목련이 생명의 기운을 거침없이 뿜어낼 봄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