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해루질, 엄마의 기다림
강병철 소설가
바깥마당은 붉은 노을 지천이었다. 백화산 어디쯤에서 누군가 빨강 뼁끼통을 쏟아 부었거나 빨간 포장을 홀라당 뒤집어씌운 게 분명하다. 갈마천 서녘으로 아슴아슴 드러난 피빛 자국으로 보리밭 잘린 밑동 구멍마다 쑤셔 넣더니 어느새 외양간 구석구석까지 붉은 물감으로 싸그리 채워넣었다. 그리고 아홉 살 소년 혼자 바깥마당에서 자치기하는 중이었다.
“해루질 따라 갈텨?”
팔봉에서 원정 머슴 나온 영뵉이 성님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 짓는다. 밤마실 금지령 내린 부모님 말씀이 얼핏 떠올라 머뭇거리는데.
“말 테여? 쭈아, 우덜찌리 간당.”
그 순간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울컥이 치밀면서.
“성님덜 가먼 나두 가능 거지. 나만 떼놓구 가먼 비겁자융. 바늘 가는디루 실두 가능 거잖남?”
“벵철이 아부 백단에 눈치두 백 단이넹.”
'벵철이가 아니구 병철이라구흇."
"병 처리 헌다구. 고물상이루 병 처리헤주구 엿 바꿔먹남?"
그렇게 윤환이 성님과 증섹이 성님까지 갓 스물을 넘은 풋풋 청년들의 뒤를 따라 밤바다에 나섰다. 보리 이삭 여문 유월 말이었고 발목 정도 물이 차는 썰물이었다. 작살을 들고 바닥으로 비늘 터뜨리는 물고기 등에 내리찍는 원시적 사냥 스타일인데.
어두워도 무섭지 않고 아랫도리로 풋풋한 온정이 솟는 느낌은 형님들 응원 탓이다. 달님도 태양처럼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지느러미 치는 물고기 비늘이 너무 예뻐 황홀한데.
“잘 봐라. 을매나 이쁘냐?”
발목 아래로 헤엄치는 도미 새끼가 보였고 이따금 갯장어도 구불텅구불텅 뻘흙을 헤집는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달님이 물살에 흔들리는 풍경도 어질어질 황홀했다.
"이쁜디 웨 작살루 찍는댜?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그저 밤바다에 취한 채 갯장어와 망둥이, 박하지 몇 마리로 구럭 절반쯤 채우는 게 행복했던 것 같다. 흐뭇한 포만감으로 염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차.
“인제 오닛?”
진둠벙 징검다리 건너 부모님께 딱 걸린 것이다. 아버지는 노여움으로 붉으락푸르락 남포등을 흔들었고 어머니는 눈시울 닦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 나는 보았다. 어머니의 눈시울에 초승달 한 줄기 뿌옇게 번지는 풍경을 분명히 보았다.
중년의 부부는 초저녁 이후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 아들을 찾아 온동네를 헤집었단다. 양지편 서낭당에도 없었고 톳골 노름판 바깥마루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동네 구석구석 죄다 헤집어도 찾지 못하자 진둠벙 검바위 앞에서 네 시간 내내 기다렸다는 후문인데.
“진지 잡수셨슈?”
형님들은 생뚱하게 ‘식사 안부’와 람께 감나무 뒤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나 혼자만 남았다. 그렇게 꺼이꺼이 울긴 했지만 밤바다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리고 60년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렀다. (이 글은 장편소설 『해루질』에서도 썼던 사연이다.)
그리고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흐르고 흘러.
어머니의 병상 6년째, 6년 전 처음 입원하셨을 때만 해도 고운 자태를 한동안 유지해서 페이스북에 이따금 얼굴을 올리기도 했었다. 벗들이.
'오우, 93세가 그리도 예쁜가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철없이 우쭐도 했던 어이없는 행태를 반성한다. 지금은 98세이니 더 이상 쇠할 몸도 없다. 언제부터였나, 나는 수수깡처럼 마른 엄니의 몸을 스마트폰에 담을 자신이 없다. 콧줄 식사로 지탱하는 그미의 명줄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마찬가지이다. 식솔들이 번갈아 찾아올 때마다 여윈 몸이나 확인한 다음 시린 가슴으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더러는 눈망울에 해루질 가던 밤바다 초승달이 설핏 서리기도 하니 그게 모친의 지극한 흔적이리라. 그리고 나는 방문할 때마다 망부석처럼 서 있던 두 부부의 기다림을 떠올리며 자꾸만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이따금 ‘느이들도 70 안팎이구나’ 하며 가여워하는 쓸쓸한 눈빛이다.
그랬다. 손주들이 방문하면 그나마 눈에 힘을 강하게 주는 것 같다.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어도 고스란히 감수하신다. 함께 간 손주 하나가.
“할머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납죽 숙이며 작별 인사를 드리자 눈시울에 반짝 달빛을 품었을 뿐이다. 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오래 사세요’도 아니고 ‘하느님 이제 편안하게 모셔가세요’까지 어느 것 하나 드릴 말이 아니다. 2025년도 2월, 늦은 폭설이 온누리에 수북하게 쌓인 대보름 전날이다. 이제 까맣게 쥐불 놓은 자리마다 봄날의 새순들이 노랗게 피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