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청동거울의 가격은 얼마?
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물건의 가치를 가격에 둔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제일 비싼 건 뭐예요?”란 질문도 많이 받는데, 그 대답은 항상 “문화유산의 값을 매기는 것은 박물관에서는 하지 않습니다”이다.
하지만 조금 질문을 바꿔 “이 청동거울의 당시 가격은 얼마였고, 그 정도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의 가치였어요?”라고 묻는다면, 상당히 당혹스런 상황이 될 것 같다. 필자가 공부하는 청동거울은 연구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청동거울의 가격과 관련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원 전후한 시기 청동거울의 가격은 얼마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미국 하버드대학 미술관으로 가보자. 여기에 소장된 청동거울 중에는 고리 주변에 ‘경직삼백(鏡直三百)’이라 적혀있다. 거울의 가격이 300전이라는 뜻이다. 또 가장자리에는 영평7년 정월에 만들었다는 ‘영평칠년정월작(永平七年正月作)’과 공손씨 가문에서 만든 거울이라는 ‘공손가작경(公孫家作鏡)’라는 글이 적혀 있다. 영평 7년은 64년으로 이때 청동거울의 가격이 300전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청동거울은 지름이 13㎝이며 무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략 300g 정도로 추정된다. 당시 동전인 오수전(五銖錢) 하나의 무게가 3.2g이므로 대략 동전 100개를 녹이면 청동거울 하나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다. 청동거울의 가격 300전에서 재료비가 100전을 빼면 200전은 만든 공손가의 노동비와 판매수익을 합친 것이 된다.
그럼 300전은 어느 정도의 금액일까? 중국 한나라 때에도 물가는 계속 변화했기 때문에 정확히 64년의 물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대신 대략적으로 살펴본다면 한나라의 전형적인 농민들의 가정은 5인으로 구성돼, 100무(畝)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100무는 가로 24 걸음, 세로 10 걸음의 땅이다. 여기서 수확된 곡물로 1년 동안 생활을 했는데, 1무에서 수확되는 양은 곡물 1.5석(石)으로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먹는 양이다. 즉 100무에서는 연간 곡물 150석을 수확하는데, 수확량의 1/30인 5석은 국가에 땅에 대한 사용료로 납부했다. 그리고 5인이 한 달에 1.5석씩 12개월을 먹어야 하므로 90석은 저장하고 나머지 55석은 국가에 판매했다.
1석은 약 30전(錢)으로 한 가구당 55석을 팔아 1650전을 벌여 들였다. 여기서 인두세(人頭稅)가 15~56세의 성인은 120전, 3~14세의 아이는 23전을 납부해야한다. 5인 가족 기준으로 약 400전 정도의 인두세를 납부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남는 1250전으로 1년을 버티게 된다. 이 돈으로는 청동거울을 구매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농민들은 곡식 10석을 사는 것이 생활에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당시 거울을 구입할 수 있는 이들은 주로 관직에 있는 공무원들이었다. 가장 높은 관직인 승상(丞相)의 경우 10000석, 중앙에서 임명하는 가장 낮은 관직인 좌사(佐史)의 경우 100석의 녹봉을 받았다. 100석의 녹봉이면 3000전의 돈으로 12개월로 나누면 250전 정도가 된다. 이 정도 벌이라면 청동거울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은 있어 보인다.
때문에 청동거울을 만들어 파는 이들은 구매력이 있는 공무원이나 부유한 이들의 취향에 맞춰 청동거울을 디자인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같은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의미의 ‘위지삼공(位至三公)’, 집안에 자손이 많기를 바란다는 ‘장의자손(長宜子孫)’, 집안에 항상 부유함과 귀함이 넘친다는 ‘가상부귀(家常富貴)’와 같은 글을 거울에 새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평상시에 사용하던 청동거울을 무덤에 함께 넣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한나라의 무덤에서는 거울이 화장용품 상자(漆匳)에 담겨서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청동거울은 당시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일종의 필수품이었다.
물론 이것은 중국 한나라의 이야기이며 한반도에서 청동거울은 더욱 비싼 사치품이었다. 발견되는 수량은 중국에 비해 월등하게 적고, 그만큼 청동거울은 귀한 것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대의 충북 청주 오송, 충주 호암동 등지에서도 청동거울을 가진 무덤이 발견되는데, 거울 외에도 청동검이나 도끼 등 다양한 청동기들이 함께 발견된다. 이 거울은 중국 한나라 때 화장용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지배자의 물건이었다. 이것을 가진 이들은 당시 농경사회의 의례를 주관하던 무당과 같은 존재로서 최고 지배자였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고려시대가 되면 청동거울은 중국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화장용구로 사용된다. 여인들의 필수품이 된 청동거울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다양한 형태와 무늬, 글귀를 가지게 된다. 수요가 많은 만큼 가격도 훨씬 싸졌을 것이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는 3월부터 특별전 ‘동경, 시대를 비추다’를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된 다양한 청동거울과 이건희가 수집한 청동거울을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방문해 나만의 거울을 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