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봄이 오는 정원에서의 단상

강종구 바이오톡스텍 대표·충북대 수의대 명예교수

2025-03-20     동양일보
▲ 강종구 바이오톡스텍 대표·충북대 수의대 명예교수

봄이 오는 길목에 올해 들어 가장 매서운 꽃샘추위와 눈보라가 기승을 부렸지만 입춘이 지나 따스한 봄기운이 느껴진다. 혹독한 추위를 겪어야 더 화창한 봄이 오는 것 같다. 지난 눈은 비보다 아쉬웠지만 곧 녹아서 목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봄의 메신저이자 반가운 선물이었다. 눈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생명의 입맞춤이자 엄마의 포근한 가슴이자 사랑의 속삭임이었다. 눈 녹은 땅속에서 잠자던 생명들이 눈부신 바깥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봄 냄새나는 정원으로 나갔다.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목련, 백태기, 연달래, 개나리의 꽃망울은 커졌다. 매발톱, 붓꽃, 상사화, 수선화, 원추리, 달맞이꽃 새싹들이 뾰족 얼굴을 내밀며 인사한다.
산속 정원은 자연의 순환과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심신에 위안을 주는 휴식처이다. 봄의 산 곳곳에 만개한 화사한 꽃들과 싱그러운 연두색 여린 잎의 신록은 한 폭의 수채화다. 여름 산의 짙고 울창한 녹음, 가을 산의 형형색색 화려한 단풍은 장관이다. 잿빛 겨울 산의 순수하고 초연한 경관은 한 폭의 수묵화이다.
사계는 돌고 돌지만 유독 겨울 산과 나무에 애잔함을 느끼는 이유는 왜일까? 삶의 여정에서 겨울인 나이 탓일까? 모든 잎을 떨궈 헐벗은 겨울나무처럼 맨몸으로 가는 인생인 만큼 온갖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남의 허물도 덮을 수 있는 온유한 인간으로 늙어 가고 싶다. 6년째 정원을 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삶의 가치와 인생을 배웠고 소소한 기쁨과 지혜를 얻었다. 70여 년을 허겁지겁 바쁘게 살아왔다. 한때는 교수였고 지금은 기업 대표이지만 정원사가 돼 아담한 수목원을 만들고 나무, 풀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
고독한 영혼 같은 겨울 산과 겨울나무에 마음이 끌린다. 겨울 정원은 온갖 나무들이 잎새를 다 떨궈 부러지고 뒤틀린 가지, 몸속 상처까지 지난 삶의 굴곡을 스스럼없이 보이며 알몸 향연을 하는 공연장이다. 나무마다 다른 멋진 수피, 굵고 가는 가지에서 세세한 잔가지까지 이어지는 황홀한 선의 향연에다 하얀 눈꽃을 피운 겨울나무는 비우고 버려서 더 순결하고 아름답다. 키가 크건 작건, 수폭이 넓건 좁건, 볼품 있건 없건 좁은 공간에서도 다투거나 경쟁치 않고 배려와 양보로 살아가는 나무를 보며 인간의 도리를 배운다. 겨울 산은 뼈만 남은 앙상한 가지로 매서운 칼바람에 맞서며 하늘의 여백을 감싸고 의연히 서 있는 산마루 나목들과 크고 작은 산들의 능선과 계곡이 겹겹 첩첩 이어진 물결같이 수려한 능선들과 산 곳곳까지 텅 비워 회색빛 속살을 숨김없이 보여줘 더 아름답다. 눈 내린 산 중턱과 계곡에 쌓인 설경의 고요함과 평화는 태고의 순수한 영혼이다.
구불구불 용틀임한 듯한 운용 매화의 아름다운 가지에 하얀 꽃이 은은한 향을 피우고 있다. 연초록 새순 위에 올해 처음 만난 청개구리가 반갑게 인사한다. 혹독한 겨울 청개구리는 어디서 어떻게 버티다 나왔을까? 풀냄새, 흙냄새 피어나는 정원이 잔잔한 행복감으로 다가온다. 정원은 흙, 물, 햇빛, 바람, 바위가 풀과 나무와 조화를 이루어 협주하는 작은 교향악단이다. 새, 벌, 나비, 풀벌레들은 단원으로 일조한다. 멀리 산 계곡과 능선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운무는 멋진 무대가 된다. 빗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 풀잎소리, 꽃잎과 나뭇잎 흩날리는 소리는 한편의 세레나데이다. 비바람,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서면서도 연주는 지속된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지만 정원에 못생긴 나무와 쓸모없는 잡초는 없다. 모두가 단원이고 가족이고 친구이고 소중하기에 굳이 남을 만나러 외출할 필요가 없다. 침침하고 울적한 아파트에 방콕하면 아내와 다툼뿐이지만 정원에서는 각자 할 일이 있어 잘 맞는 케미가 된다. 봄이 오는 정원에서 꽃을 처음 마주하는 것은 행운이고 감격이다. 3월 초 가장 먼저 꽃 피운 노란 복수초는 아직도 옹기옹기 피어 있어 벌들이 분주하다. 복수초는 글리세롤이라는 부동액 성분이 있어 열을 발산해 주위 눈을 녹여 가장 먼저 꽃 피는 봄의 전령사로 낮에는 피고 흐린 날이나 해가 지면 오므라드는 행복과 장수를 의미하는 야생화이다.
사계의 봄은 왔지만 지난 연말 계엄 이후 탄핵정국 여파로 정치권과 민심의 분열은 극에 달해 헌재 선고 결과에 상관없이 정국의 흐름은 안개 속으로 우리의 봄은 아득하다. 차가운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흐르고 혹한과 눈보라가 거셀수록 언제처럼 더 따스한 봄은 반드시 온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정, 소망, 정의와 화합에 목마른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의 고난과 위기를 잘 극복해 더 위대한 선진국으로 거듭나는 찬란한 봄이 오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