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개나리에 대하여

강병철 소설가

2025-03-23     동양일보
▲ 강병철 소설가

진도의 작가촌으로 부부살이 떠난다는 소문이 돌면서 벗 하나가 대뜸.
“그럴 테면 왜 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 덕분에 술, 담배가 멀어지고 아침 반찬도 화려하답니다. 끼니마다 식단별로 차려 먹으니 살이 포동포동 오르네요.
그리고 조개잡이에 빠졌습니다. 초로의 팔뚝으로 흡입되는 햇살의 시끈시끈한 느낌이랄까. 그 동죽의 해감용 갯물을 길어오다가 노랗게 터지는 개나리 꽃사태를 만났답니다. 그래요. 이파리가 벌어지면서 ‘물씬물씬’이란 의태어가 저절로 터지네요. 동시에 겹치는 유년의 아스라함이라니.

여덟 살 때인가요?
우리 집에서 언덕을 넘어야 서해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천수만 가는 오솔길 그 옴팡집 울타리로 개나리가 피어있어요. 그렇게 노란 꽃 찾아 까치발 서던 소년의 풍경이 있었답니다. 하여, 빈 소주병에 꽂아 놓는 찰나 아, 하는 감탄사가 화사하게 터졌답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지는 거예요. 새벽에 깨어보니 꽃잎이 절반 이상 뚝뚝 떨어졌어요. 다시 하굣길을 마치고 사립문 열자 나머지 꽃잎까지 싸그리 떨어지면서 생애 처음으로 허망함을 느꼈지만.
‘개나리 뿌리 향기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빈 꽃병의 숨을 깊이 빨아들이다가 콧구멍 파고드는 구린내로 기절하는 줄 알았지요.

원효로 뒷골목 자취생인 고교 시절,
키 순서로 번호로 평균 5번(60명)쯤 했으니 언제나 앞자리였지요. 뭐든지 멍하니 쳐다보는 버릇을 가진 조무래기 청소년이었구요.
134번 시내버스 정거장 맞은편 저택 울타리로 개나리꽃이 피어있었답니다. 새벽 햇살 받은 노란 꽃망울이 하늘 가까이 반짝반짝 번지는 거예요. 여염집 염탐하는 사내놈의 허벅지처럼 담장마다 치렁치렁 걸려있는 풍경을 보며.
‘아름답다.’
그 개나리 꽃잎도 너무 빨리 떨어졌어요. 봄비 한 차례에 바닥에 깔린 노란 잔흔들.
“예쁜 꽃은 아주 빨리 진다.”
싸 - 하는 가슴으로 일기장에 적었구요.

스무 살, 대학 캠퍼스에서도 개나리 노란빛으로 한 해를 시작했지요. 종소리 울리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던 ‘슬픈 우리 젊은 날’이었답니다. 아주 잠깐 노란 꽃망울에 취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철뚝길 목로에서 막걸리 몇 잔 넘기는 사이에 꽃잎이 사라졌어요.
'우이 쒸, 왜 빨리 사라지는 거야.'
그렇게 2학년을 마치고,
입대 영장을 받자마자 교무처에 휴학계를 내고.
“3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소리치며 입대를 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군대 막사의 개나리꽃이 그리도 오래 피는 겁니다.
아침 식사 집합이 늦었다고 ‘대가리 박아’ 기합 중이었어요. 가랑이 사이로 보이는 개나리도 노랗게 식은땀 흘리고 있더랍니다. 15분이 지나도록 그대로 피어있었어요. 내가 태권도 승급 시험에 떨어져서 소나무 도는 선착순 뺑뺑이 직후에도 개나리 꽃잎이 밥풀떼기처럼 철썩 붙어있더라고요.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참 양말 두 켤레를 잃어버려 싸대기 맞을 때에도 꽃잎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한밤중 보초 설 때까지 그 모양 그대로인 개나리를.
‘이상하다. 플라스틱 꽃인가?’
손을 대는 찰나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긴 했지요.
‘이제 알겠다.’
그래요. 군대 막사의 시간이 지긋지긋 느리게 흐른 거예요. 시간이 안 가니까 ‘꽃이 늦게 진다’고 착각했던 거였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대병이 된 지 44년, 개나리 노란 물감 순환도 마흔다섯 차례나 만났습니다. 진도의 개나리도 조개잡이 한두 번 더 나가면 사라지겠지요. 빛의 속도로 흐르는 세월처럼 저 노란 틈입자도 반복 순환으로 몸을 재빨리 숨긴답니다. 그 사이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키가 3센티 줄었습니다. 그 세월의 압박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섭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