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箕山, KISAN, 鄭蓂熙 그리고 증명희

정명희 화가

2025-04-02     동양일보
▲ 정명희 화가

KISAN, 기산 정명희. 모두가 나를 부르는 공식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대전한밭중)에 입학 했을 때, 명찰에 쓰여 진 한자이름 아래 적어놓은 ‘증명희’란 이름을 본 것만큼 반갑지는 않다. 그 시절 선생님들은 나를 ‘증명희’라 불렀고(한자로 쓰여 진 출석부의 내 이름 ‘蓂’명자 밑에 담임선생님이 펜글씨로 ‘명’라고 토 달아 놓았었다.), 또 학교든 동네든 형들은 나를 ‘증명희’로 불렀고 후배들은 그냥 ‘명이 형’이라 불러왔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림 그리기에 빠져 몸은 학생이지만 생각은 화가의 반열에 있었기에 독학의 행보가 꽤나 빠르게 진행된 셈이다. 아마도 그 때부터 혼자 걷는 행보가 몸에 뱄을 것이 분명하다. 제대 후 고향(충남 홍성군 홍동면 수란리)을 떠올리며 지은 기산(箕山)이란 아호를 지금껏 쓰고 있다. 첩첩산중인 고향 동네는 밖으로 이어진 좁은 길 말고는 온통 산이다. 키를 엎어 놓은 형국 이였기에 자연스럽게 키 기(箕)자를 고를 수 있었고 당시 유행하던 묏 산(山)자를 붙여 만든 자호였다. 후에 기산영수(箕山潁水)가 중국하남성에 있음도 알았고 허유(許由)와 소보(巢父)가 세상을 피해 은거했던 곳임도 알았다. 물론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지금의 평양이 아닌 요하문명의 중심임도, 평양성의 옛 이름이 기성(箕城)이였음도 알게 됐다.
산수화로는 21세기에 남을 수 없음을 간파하고 새 밀레니엄을 맞는 2000년에 ‘누가 너희를 새 천년에 남기랴(사비나미술관, 공평아트센터)’란 전시를 통해 ‘KISAN'이란 영문 아호를 대신한 싸인으로 쓰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수화의 동감을 위한 점경인물이나 진배없던 작은 새 한 마리를 미래를 위한 구원투수로 믿었기에, 오래 그려온 실경을 버리고 0.01%도 되지 않는 새 한 마리에 목숨을 건 까닭이다. 그 새는 돌연변이를 거듭하면서 나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바꿔 기산의 정체성으로 대변됐으며, ’Freedom Trail' 연작 번호를 650번에 달하게 해 팔순 전(八旬展) 'Freedom Trail. 5(서울, 대전, 홍성)'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시키고 있다.
최근 걸어서 남극횡단을 결행한 산악인 김영미(1980~ )대장의 낭보를 접하며, 고산등반으로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랑탕 등을 트레킹하고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와 유럽의 엘브루즈를 오른 나였기에 마음은 그 기쁨을 공유할 수 있었다. 69일을 걸어서 1786km를 강추위와 눈보라를 뚫고 남극점을 밟은 여장부를 환영한다. 진심으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을 그에게 다시 한 번 더 축하를 보낸다. 생명을 건 행보는 누구나 흉내 낼 수 없는 용기다. 예술가의 행보가 그에 못지않기에 가슴 미어지는 그 기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을 귀하게 만드는 건 자식 된 도리며 효도의 한 방법일 수 있다. 때문에 함부로 쓰기를 꺼려 선인들은 아호를 지어 사용했었다. 내 이름은 한학자인 백부가 지어 아버지에게 권했고, 외조부가 지은 내 이름(郁)은 아우의 몫이 됐으며, 아버지가 지었던 이름(雄)은 자연스럽게 먼저 난 조카에게 돌아갔다. 정성을 기우려 지은 이름을 버릴 수 없었던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그 이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진 것임을 재인식해야 한다.
팔순 전을 계기로 다시 돌아본 ‘KISAN, 箕山 鄭蓂熙, 그리고 증명희’를 한 번 더 응원한다. 명(蓂)자는 지시초의 이름이며 날을 헤는 ‘책력 풀’이다. 하루에 한 잎씩 나고 열다섯 잎이 되면 반대로 하루에 한 잎씩 졌다는 신비한 식물이었다고 전한다. 이름에 걸맞을 행적을 위해서라도 남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자는 각오를 단단히 한다. 다만 이 씨와 리 씨, 유 씨와 류 씨처럼 정(丁)씨와 증(鄭)씨를 구별해놓지 못한 조상을 위해서라도 향후 좋은 계기를 통해 ‘증 씨’로 새롭게 거듭나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