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11>

나는 망국의 백성으로 포로 신세가 됐다

2025-04-22     김명기 기자
▲ 일본군으로 나고야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했던 안동준은 먼 후일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으로 일본 거물 정치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사진은 가이후 도시키(76~77대 일본 수상)를 접견하는 안동준(가운데) 선생. 맨 오른쪽은 이재형 전 국회의장으로, 이들 세 명은 모두 일본 중앙대학 동문이다.

‘1.20 동지’ 가운데 이호근(李浩根)이 있었다.
그는 예천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친 밑에서 고이 자란 귀한 집 아들이었다. 음악과 문학을 좋아했던 친구였다.
키가 작은 데다 다리가 짧아 훈련 때면 땀을 가장 많이 흘렸다. 구보를 하면 으레 맨 꼴찌였다. 그럼에도 그는 중도에 포기하는 적이 없었다. 그만큼 정신력이 강했다.
일본인 교관들도 그의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줬다.
그는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청년 운동과 정치에 투신해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민주당 정부 땐 경상북도 도지사를 역임했다.
‘1.20 동지’였던 이들, 나라 잃은 설움을 함께 했던 이들의 면면은 모두가 훌륭했다.

●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우고 있나
군사교육이 끝나갈 무렵, 1944년 늦은 가을 어느 날, 조선으로부터 학병 가족 몇 분이 위문 차 찾아왔다.
경성제대 재학 중 학병으로 온 김정진의 백씨인 의학박사 김성진씨가 서울 대표로 왔고, 충북을 대표해선 안동준의 친척 동생인 안길준의 형수, 김병덕씨가 왔다. 그녀는 한 동네에서 둘이나 같은 부대에 배속된 점이 참작돼 충북대표로 오게 된 것이었다.
위문단은 떡과 술, 담배 등속을 가져왔지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무력감이 동시에 오기도 했다.
‘우리는 왜 하루 종일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으며 일본군이 돼 있는가,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우려 하는 것인가.’
늘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마음이 아팠다.
안동준은 더욱 그랬다.
충절과 의기를 보였던 가계(家系)를 보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조있고 품위있는 가문의 후예로, 자신이 일본군이 돼 있다는 것이 절망스럽기도 했다.
단종 복위를 계획했다가 이슬로 사라진 선조들의 충의 정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 선봉장이었던 안충현공의 호국정신, 사관으로 직필정론을 견지하다 화를 당한 을사명신 안한림공의 정의 정신, 일제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충혼.
면면히 흐르는 순흥안씨의 남아인데도, 학병 거부도 하지 못한 채 일본군으로 들어와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 “나는 조선인이오”
특별면회엔 조선인 학병 30여 명과 면회를 온 가족들 뿐만아니라 조선군과 총독부 관계자, 나고야부대 관련 군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안동준을 이때다 싶어 발언권을 얻은 뒤 말했다.
“나는 조선인이오. 그런데 난 지금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일본군의 한 사람이 돼 훈련을 받고 있소. 그건 우리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요. 특히 군대와 외교력이 약해서 일본과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제 합병을 당해 주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탓이오. 그러나 우리 조선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소. 일본 역사는 2000년에 불과하오. 문화에 있어서도 우리 조선은 일본보다 월등하게 오래되고 앞서 있소. 그럼에도 우리 조선은 오늘날 일본에게 무릎을 꿇고 망국의 한을 품게 됐소. 서구식 과학무기와 전법을 도입해 조련이 잘된 군대를 가지고 우리를 침범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우리 조선은 한 번 싸워보지도 목한 채 손들고 만 것이오. 지금 망국의 백성으로 포로 신세가 된 것이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잘못 때문에 여기에 끌려와 고생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잠못 이루는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오.”
주위가 숙연해졌다. 일본군 관계자들은 짐짓 못들은 척 했다.

● 죽음의 길이었던 사이판행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기습 당한 미국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 됐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 계기를 만든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패퇴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2년 2월엔 가달가날에서 대접전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의 완패였다. 이를 기화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조선 학도병은 그런 와중에 징집됐던 것이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