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꽃이 피어나는 봄처럼
양선규 시인·화가
일 년 중 가장 나들이하기 좋은 절기가 벚꽃 필 무렵, 청명(晴明)이다. 햇살 맑아 하늘 푸르고 온화한 날씨로 꽃은 피어 세상 환하다. 매년 봄이 되면 김천시 교동, '연화지'로 벚꽃 놀이하러 가지만, 꽃 피는 시기와 살갗에 이는 바람, 꽃의 결이 갈 때마다 새롭다. 올봄에는 물오른 벚나무 가지와 연못에서 연신 입을 오물거리며 노는 붕어도 키가 좀 큰 것 같다
중부 지방에 벚꽃이 필 때면 전국적으로 모든 봄의 꽃들이 동시다발로 핀다. 이제 매화, 벚꽃은 지고 명자꽃, 살구꽃 등이 한창이다. 예전에는 진해, 경주, 하동 등 특정한 장소를 찾아 나서야 벚꽃놀이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어디에서든 큰 발품 팔지 않고도 벚꽃 놀이가 가능하니 전국적으로 가장 흔한 꽃이 벚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천 교동의 연화지는 조선 시대 초기에 농업용수를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던 저수지였는데, 물이 맑고 자연경관이 수려해 풍류객들이 연못 한가운데, 섬을 만들고 정자 이름을 봉황대(鳳凰臺)라 지어 시를 읊고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전해진다
봄에는 하얀 벚꽃이 상춘객들을 불러 모으고 여름에는 연꽃이 피어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조명 시설을 잘 갖추어 야간 벚꽃 사진 촬영지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연화지는 현직 교원 시절 함께 근무하던 교직원들과 밤 벚꽃놀이하러 다녀온 이후로 가족들과 함께 자주 다녀오던 곳이다. 내가 사는 영동에서 30여 분 거리에 있어 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으니 올해도 매곡으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 직지사를 거쳐 벚꽃 핀 환한 봄의 ‘연화지’ 뜰을 거닐던 때를 뒤돌아본다.
'봉황대(鳳凰臺)는 연화지, 김산 향교와 함께 교동이 조선 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으로 1700년에 창건되어 처음에는 읍취헌(邑聚軒)이라 불렀다. 원래 김산 관아의 북쪽 구화산 아래에 있었는데, 헌종(憲宗) 4년 1838년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중앙으로 옮겼다.'
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 군수를 지낸 윤택(尹澤)이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 연(鳶) 자에 바뀔 화(嘩) 자를 써서 연화지라 이름 지었고 날아간 봉황의 방향이 읍취헌 쪽이라 다락 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대부분 연화지의 내력을 잘 살펴보지 않은 사람들은 연화지를 그냥 연꽃이 피는 연못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바쁜 일상생활 중 여행을 하다 보니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지나쳤기 때문이리라.
벚꽃이 피었다 꽃비가 내리면 지산 김형옥 선생이 부른 ‘사철가’와 가수 백설희 선생이 부른 ‘봄날은 간다’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이처럼 세상은 언제나 꽃이 피고 지고 어둠과 밝음, 슬픔과 기쁨, 생과 사가 반복되고 순환하는 삶이 항상 우리 곁에 있으니 당연한 이치다. 이제 아무 말 없이 녹음으로 짙어가는 산과 들에 기대어 또 다른 혜안(慧眼)을 가지고 새로운 풍경을 그리며 살아야겠다. 춘화경명(春和景明), 춘풍화기(春風和氣), 라 했던가 화창한 봄날 산수의 경치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아름답다. 따스한 바람과 봄날의 기운이 사람들의 가슴에 머물기를 바라본다.
세상 조용할 날 없지만, 순천자흥(順天自興) 하는 마음으로 중용(中庸)의 도를 실천한다면 꽃이 피어나는 봄처럼 세상도 좀 잠잠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내어본다. 산수유, 매화, 목련, 진달래, 벚꽃 순리대로 피어나는 저 대자연에 귀 기울이고 꽃을 닮고 싶어 하는 그런 간절함, 모두 함께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