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주장/ 동학혁명군 ‘국가유공자’ 지정을
이달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일연합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패배한다. 당시 1만이 넘던 농민군은 겨우 3000여명만 살아남았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후기 농민들이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와 외세의 간섭에 저항하며 일어난 운동이다. 그 기저는 ‘동학’이었고 이는 민족종교로서 동학 혁명군의 단결을 촉매한 정신적 이념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농민 봉기를 넘어 부패한 정치 개혁과 민족자립을 열망한 민초들의 요구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국민 대부분 이견이 없다.
그런데 혁명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압도적 전력차이 앞에서 학살에 가까운 대패를 당한 뒤 그들에 대한 ‘국가유공자’ 서훈은 131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봉준이 사형 당하기 전 법정의 심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원본이 소장돼 있는데 이 공초에는 전봉준이 외세에 저항하기 위해 2차 봉기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학농민혁명의 1차봉기는 1894년 3월에 이뤄졌다. 2차봉기는 같은 해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한반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일어섰다. 즉 2차봉기는 주로 외세에 저항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 내용이 중요한 이유는 정부가 동학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반박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현재 국가유공자 선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광복 전까지의 활동이다. 1962년 당시 문교부가 내규를 만들면서 그 시작점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1895년 10월)에 반발한 항일 무장저항 운동인 을미의병으로 정했다.
정부는 동학군이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서훈 대상자가 될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문교부가 내규를 정한 1962년 당시에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없었고, 그나마 1990년대 이후에나 웬만큼 정립돼 2차 동학농민혁명 봉기를 항일 구국투쟁, 독립운동 등 외세에 대한 저항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같은 견해의 맥락은 국가유공자 선정 기준을 을미의병 시기 이후로만 볼게 아니라 동학혁명도 외세의 간섭에 저항한 최초의 '민중 주도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었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동학혁명은 나중에 3.1운동과 수많은 독립군·의병들의 무장 투쟁으로 이어지는 민족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또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싸운 민중의 의지의 표상이었고 농민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서는 국가유공자 선정의 공적심사 가이드라인에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학생들이 배우는 현행 교과서도 동학농민혁명 2차봉기를 항일구국투쟁으로 서술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가자의 서훈에 대해 정부는 더욱 전향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오로지 을미의병 시기를 기준으로 할게 아니라 동학이 외세에 저항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그 노력이 현대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평등과 정의, 평화와 자주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국가 존립의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같은 객관적 전후과정을 살펴 독립유공자법을 개정하고 동학혁명 참가자들에게도 국가 서훈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