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지방소멸시대, 새로운 설계도가 필요하다

백기영 유원대 교수

2025-05-25     동양일보
▲ 백기영 유원대 교수

2020년, 대한민국은 사상 처음으로 출생자 수가 사망자 수보다 적은 ‘인구 데드크로스’ 시대에 진입했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수도권으로의 집중은 갈수록 심화되고, 지방은 점점 더 빠르게 공동화되고 있다. 2023년 기준, 전국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절반 이상인 119곳이 ‘소멸위험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대상은 농산어촌뿐 아니라 중소도시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방은 지금, 고령화와 청년 유출, 일자리 상실, 생활 기반의 붕괴라는 다층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방소멸은 단지 인구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학교가 문을 닫고 병원이 사라지며, 지역 상권이 무너지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사람과 기능이 동시에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살 수 있는 공간’이 전국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 위기는 단지 특정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토의 균형성과 회복력을 위협하는 구조적 재난이다.
이미 이 같은 위기를 먼저 겪은 국가들은 근본적인 전환에 나섰다. 일본은 ‘관계인구(関係人口)’ 개념을 도입해 상주인구가 아닌 방문·체류 인구와의 유대를 통해 지역 기능을 유지하고 있으며, 국토교통성은 소규모 지역거점을 중심으로 ‘콤팩트 시티’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스마트 축소’ 전략을 통해 도시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의료·문화·행정 기능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도시공간을 재구성 중이다.
한국 역시 2022년 「인구감소지역 지원 특별법」을 제정하고, ‘생활인구’ 개념을 정책화하며, 고향사랑기부제, 워케이션, 로컬유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정책이 분리되어 있고, 행정구역과 실제 생활권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단기적 성과 중심의 예산 집행, 부처 간 연계 부족, 지자체별 역량 차이 또한 정책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제는 보다 구조적이고 종합적인 공간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방소멸 시대, 우리가 풀어야 할 공간정책의 핵심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통합 공간전략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도시계획은 도시 안에서, 농촌정책은 농촌 안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 삶은 시·군·구의 경계를 넘나든다. ‘콤팩트·네트워크 구조’는 농촌의 생활거점을 중심으로 인구와 기능을 집약하고, 도시와 연결된 교통·복지 인프라를 연계해 하나의 유기적 생활권을 만드는 전략이다. 이는 ‘작은 도시+넓은 생활권’이라는 미래형 국토구조의 밑그림이 될 수 있다.
둘째, 공간계획과 행정체계의 통합적 개편이 필요하다. 생활권은 광역화되고 있지만 행정체계는 여전히 과거 산업화 시대의 틀에 갇혀 있다. ‘광역시·도’ 통합, 자치구·읍면동의 기능 재조정, 생활권 기반 행정서비스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동시에 도시·군기본계획, 성장관리계획, 농촌공간계획을 통합한 종합계획 체계를 통해 중복을 줄이고, 거점 기능 중심의 국토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셋째, 사람 수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를 보는 인구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더 이상 인구를 서로 끌어오려는 경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역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다. 방문객, 디지털 주민, 귀촌 준비자, 기부자를 포함한 다양한 생활인구·관계인구를 지역의 자산으로 보고, 이들과 연결된 문화·주거·복지 서비스를 설계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지방소멸은 단순한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국토의 절반이 기능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위기다. 지금 대한민국은 ‘살고 싶은 곳’과 ‘살 수 있는 곳’이 일치하는 국토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과 기능이 연결되고, 작은 생활거점이 촘촘히 이어진 구조 속에서 누구든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는 공간정책이 필요하다. 소멸을 피할 수 없다면, 그 흐름을 관리하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다. 지금이 그 선택의 시간이다.
이제는 회복이 아닌 재구성을 논해야 할 때다. 국토의 미래를 설계하는 공간정책은 더 이상 주변 과제가 아닌 국가 생존전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