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거울을 가진 사람들
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장
우리 가족 중 거울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다. 외모에 큰 관심이 없는 데다, 신경을 쓴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서 거울이 왜 필요한지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내와 두 딸은 항상 예쁜 손거울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이런 점에서 요즘 거울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외모에 신경을 쓰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거울을 지녔던 사람들은 외모를 가꾸는 데 관심이 많았던 걸까?
청주 명암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무덤 한 켠에서는 거울, 은으로 만든 머리핀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며 머리를 정리했을 것이다. 물론 여성일 가능성도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남성들 역시 상투를 다듬기 위해 머리핀을 자주 사용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외모에 신경을 썼던 사람임은 분명하다.
청주와 인접한 공주 무령왕릉에서는 청동거울 세 점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두 점은 왕의 머리와 발치에, 한 점은 왕비의 머리 쪽에 놓여 있었다. 이는 북두칠성과 같은 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하며, 망자가 저세상에서도 평안하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삼국시대의 거울은 단순한 화장도구가 아니라, 주술적 의미를 지닌 장례용품이었다.
신라 황남대총에서는 남분에서 청동거울이, 북분에서는 쇠거울이 출토되었고, 고구려 태왕의 무덤인 지안集安 마싱거우麻線溝 M2100호 무덤에서도 커다란 쇠거울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의 거울은 지위 높은 사람들의 장례에 사용되던 귀중한 물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울을 소유한 사람들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삼국시대에는 왕과 같은 정치적 권력을 지닌 이들이 거울을 가졌다면, 그보다 앞선 삼한시대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이 거울을 소유했다. 예를 들어, 2세기 김해 양동리 162호 목곽묘에서는 중국 청동거울 2점과 일본 청동거울 8점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철을 매개로 중국과 왜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하며 재산을 모은 인물로, 최근 인골 분석을 통해 젊은 여성으로 밝혀져 더욱 주목을 받았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후한 시점의 창원 다호리 1호 목관묘에서는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이 붓과 삭도와 함께 출토되었다. 당시에는 종이가 일반화되지 않아 나무판에 글을 썼고, 글자가 틀리면 삭도라 불리는 작은 칼로 깎아 지웠다. 삭도는 일종의 지우개였던 셈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지식인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거울은 다뉴경이다. 다뉴경 중에서 가장 잘 만든 것이 다뉴세문경인데, 함평 초포리와 화순 대곡리 등지에서는 이 거울과 팔주령, 간두령, 쌍두령 같은 방울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아마도 가슴에 태양을 상징하는 거울을 매고 방울을 흔들며 신을 부르던 무당, 즉 제사를 담당하던 샤먼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통일신라 이전까지 거울은 신분이 높거나 특수한 역할을 지닌 사람들의 물건이었으며, 주로 제사에 쓰이는 제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삼국시대 후반에서 통일신라로 접어들면서, 거울은 점차 외모를 가꾸는 화장도구로 기능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신을 부르는 무당의 상징이었던 거울이 점차 글을 쓰는 지식인,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된 상인, 권력을 가진 왕 등, 지배자들의 상징물이 되었고, 삼국시대의 어느 시점에선가 모든 여성들이 하나쯤 가지고 싶었던 본격적인 화장도구로 자리 잡는다. 특히 고려 이후에는 아름답고 정교한 장식의 댜양한 거울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거울, 시대를 비추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시 말미에는 고 이건희 회장이 기증한 여성들의 화장 거울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향기까지 느껴질 듯한 아름다움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조만간 이 전시를 통해 시대를 비추던 다양한 거울들을 직접 만나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