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함으로써 잠재성의 거대한 세계를 열다”

이광소 시인, 시집 『빙하역에서』 출간

2025-06-19     도복희 기자

 

부위별로 나를 재단하는 사람들

중식도로 잘리고 입맛대로 팔리고 씹히는 공유물로서

나는 제물이 아니다

제물이 아니라고, 아니라고 해도

얼굴을 지운다 부분

 

 

빛의 화살 속에서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나는 한 생을 풍요로운 동굴 아래

생수를 마시며 보냈다

누가 훔쳐 갔을까 부분

이광소 시인

 

이광소 시인의 시집 빙하역에서가 도서출판 상상인에서 출간됐다. 이번 시집은 1부 생애 내내 출렁이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2부 태초부터 불던 바람이 온몸을 감고, 3부 바람이 부는데 어디로인가 흰 새들이 날아가네, 4부 감각과 의식 사이에 묘지가 있을지라도 등으로 구성됐다.

이 시편들에서 시인은 세속적 삶에 대한 피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에 대한 거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순수라는 신화적 공간으로의 회귀를 지향한다. ‘

빙하역에서라는 이 시집 전체는 얼굴을 지우되, 응시를 포기하지 말라는 시인의 선언이 담겨 있다. 사회적 얼굴, 세속적 자아, 욕망의 상징으로서의 나를 벗어던지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영토를 향해 나아가는 이 시집의 시편들은 탈주의 시학이며 동시에, 해체 이후를 꿈꾸는 창조의 언어다.

이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등단한 지 6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헤매고 있다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고자 한다고 언급한다.

오민석(단국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는 이광소의 시들을 지배하는 철학소philosopheme결별이다. 그는 지루한 시간과 결별하고, 반복되는 현상들과 헤어지며, 규정된 얼굴들과 작별한다그는 떠나고 버리거나 해체함으로써 잠재성의 거대한 세계를 연다고 설명한다.

이광소 시인은 1942년 전주 출생으로 1965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부문, 2017미당문학 문학평론으로 당선(필명 이구한) 됐다. 시집으로 약속의 땅, 서울, 모래시계, 개와 늑대의 시간, 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빙하역에서, 평론집으로 착란의 순간과 중첩된 시간의식이 있다. 현재 미당문학 편집주간으로 활동 중이다.

도복희 기자 phusys2008@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