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20>

국군이 강해야 나라가 산다는 신념

2025-06-24     김명기 기자
▲ 여순 사건에 투입된 국군. 소위로 임관한 안동준은 여수여단에 배치돼 탄약소대장으로 병참 물자를 관리했다. 이 사건은 좌우 이념에 의해 벌어진 민족적 비극이었다.

◆ 만족스런 충주중 교사 생활
안동준은 충주중학교 최종인 교장의 요청으로 2년 정도 교사로 일했다.
1학년은 2개반으로 이뤄졌다. 한 반에 50명씩 100명을 뽑았는데, 충북 북부의 준재(俊才)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최 교장의 배려로 교사들은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나라의 동량을 기르는 일은 그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주말마다 부모님을 뵙고, 아내와 젖먹이 아이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기쁜 일이었다.
1년 가까이 교사 생활을 할 즈음, 어느 날 집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큰어머니께서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가서 뵈었을 때도 괜찮았는데, 워낙 노령이신 까닭에 급격히 나빠지신 것이었다. 일찍 수업을 마치고 달려갔을 땐 이미 운명하신 직후였다. 이담학교 설립에 큰 도움을 주었던 분이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유엔 감시위원회의 감시 아래 첫 국회의원 선거가 진행됐다.
괴산에선 연병호씨가 당선됐다. 그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6년간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다. 안동준도 그를 지지했다. 후일 안동준은 그와 정치인으로서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 빼어난 성적으로 사관학교 졸업
안동준이 다시 서울로 간 것은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였다. 신생 국가에서 군대의 역할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1948년 8월 17일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에 입학했다.
여담으로, 안동준은 사관학교 특별후보생을 뽑는다는 신문 공고를 보고 응시원서를 제출했는데, 시험 전날 내린 비로 충북선이 불통되는 바람에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형근의 도움으로 입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학병단 시절부터 이형근의 장인인 이응준씨와 친밀한 관계였던 인연의 끈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응준은 그동안 국군에 들어가서 총참모장이 됐다.
이 장군은 총참모장 전용 용지에 통위부 최영희 인사국장 앞으로 “불가항력의 홍수로 응시 시간을 놓쳤으니 추가 시험 방법을 강구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써 주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됐다.
그는 2개월 과정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1948년 10월 12일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7기 특별반의 졸업 성적은 박중윤이 1등, 안동준이 2등, 정래혁이 3등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안동준은 실제로는 자신이 최고점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 소위 임관 후 여순사건에 투입
막상 교직을 떠나 군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나니 처자식과 부모님이 걱정됐다.
정든 학교를 떠나는 것도, 정든 선생님과 제자들을 떠나는 것도 가슴 아린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신념이 있었다.
‘국군이 강해야만 나라를 지탱할 수 있다.’
그 신념은 그가 학병으로 끌려가 겪은 갖은 고초와 나라 잃은 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임관 후 안동준이 처음 부임한 곳은 여순사건이 발생한 순천이었다. 여수여단에 배치된 그는 탄약소대장으로 병참 물자를 관리했다.
여기서 그는 여순사건 문인조사반으로 파견된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시국과 관련해 월탄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박종화는 동아일보에 1948년 11월 14일, 17~21일까지 6회에 걸쳐 ‘남행록’이라는 제목의 종군기를 게재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김 소위’가 안동준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져, 1968년 이담국민학교 설립 20주년을 기념해 비석을 세울 때 박종화가 직접 비문을 집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