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21>
월탄 박종화와 만남… 나라 안정 ‘한 뜻’
◆ 한국 문단의 거두 월탄 박종화
안동준이 여순 사건 당시 인연을 맺게 된 박종화는 한국 문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박종화(1899년 10월 29일~1981년 1월 13일)의 호는 월탄이다.
안동준이 1919년생이니, 박종화와는 20년 차이. 그럼에도 군인과 문인조사반 신분으로 만난 두 사람은 뜻이 통했다. 나라의 안정과 강군에 대해 그들은 많은 의견을 나눴다.
월탄은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했다.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자였고,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이 됐다.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됐고,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했다. 이 같은 궤적은 안동준이 학병동맹의 과격한 노선에 반발해 보수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것과 맞닿아 있다.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하면서 문학 수업을 시작했고, 1921년 ‘장미촌(薔薇村)’ 창간호에 처녀작 ‘오뇌(懊惱)의 청춘’과 ‘우유(牛乳)빛 거리’의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의 길에 나선다. 이듬해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창간호에 ‘밀실(密室)로 돌아가다’와 ‘만가(挽歌)’의 두 편의 시와 ‘영원(永遠)의 승방몽(僧房夢)’이라는 수필을 발표했다.
이어 ‘오호 아문단(嗚呼我文壇)’이라는 평론과 ‘목매이는 여자’라는 처녀 단편, 시 ‘흑방비곡(黑房悲曲)’과 ‘사(死)의 예찬(禮讚)’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24년에는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에서 처녀시집 ‘흑방비곡’을 출간했다.
단편 ‘순대국’, ‘아버지와 아들’(1924), ‘여명(黎明)’, ‘부세(浮世)’(1925) 등을 쓰면서 역사소설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역사소설 ‘금삼(錦衫)의 피’(1936)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민족의 비극, 여순 사건
여순 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이다.
여순사건은 법적으로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돼 있다.
중산 안동준과 월탄 박종화는 이 민족적 비극의 서사 한 가운데서 만난 셈이었다. 안동준은 토벌군 소대장으로, 박종화는 문인조사반의 신분이었다.
◆ 경찰에 적대적 감정 가졌던 군인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봐야 한다.
첫째,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진압 명령 거부와 둘째, 여기에 호응했던 여수·순천 지역의 동향이다.
사건의 시발점이 됐던 14연대의 진압 명령 거부 배경엔 김지회와 홍순석 등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이었는데,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과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돼 있었고, 그 중에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했다.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서 창설된 14연대 요원 가운데에는 김지회, 홍순석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돼 있었다.
14연대 구성원들은 평소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많았다. 이것도 봉기의 원인이 됐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47년부터 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했다. 그런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됐다. 이는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