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시인은 구름 위에 성소를 짓는다

권이화 시인

2025-07-08     동양일보
▲권이화 시인

저녁이면 세상이 잠깐 맑아지는 때가 있다. 하루의 불협화음이 잦아들고 먼지 많은 공기도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나는 종종 귀를 기울인다. 소리라기보다 울림에 가깝다. 기타를 치던 손의 잔향,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흔적, 책상 위에 남겨진 악보의 체온처럼 그것은 어떤 존재의 온기이며 하나의 선율이다.

몇 해 전 이맘때, 노르웨이의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을 여행한 적이 있다.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그곳은 바람조차 조용히 잠든 고요의 툰드라였다. 멀리 설산을 두르고 호수를 끼고 키 작은 풀과 이끼들이 어깨를 맞댄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마치 태고의 별이나 사슴, 또는 순수한 인류의 감각으로 돌아간 듯한 인상을 받았다.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낯설고도 익숙한 그 울림은 지금도 내 귀를 여는 자리에 머문다.

마치 전생처럼 그렇게 어떤 감각은 오래도록 귀에 맺힌다. 사라진 누군가의 노래와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이 불러올 감정의 전조를 따라가게 된다. 손끝에 와닿는 미세한 바람의 진동이 구름 끝의 떨림이 서로 겹쳐지며 어느새 ‘구름사원’이라는 말을 내 안에 들여놓는다.

붉은 귀 볼륨을 올리고 꽃노래 듣는 저녁이 있다 // 저기 어떤 손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른 흔적 / 맑게 울리는 종소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공손히 노래 부른 흔적 / 두 개의 악보가 조용히 머무른 흔적 // 그 가장자리로 별 내려와 흘린 눈물 귀 기울이는 // 꽃을 엮어 만든 노래는 오래전 빙하기로 들어갔으므로 / 빙하는 날개를 펴며 얼룩사슴으로 웅웅 우는 // 저기 기타 치던 어떤 손은 저녁이면 무엇을 할까 / 이끼와 돌로 꽃 피고 지는 구름에 올라 / 기타보다 한 옥타브 높여 온몸으로 웅웅 바람을 노래할 때 // 악몽을 여행 중인 내 툰드라에 세운 구름사원의 노래 // 푸른 꽃가지 엮은 악보로 붉은 꽃송이 피운 목소리로 / 꽃노래 부른 // 저녁의 노래 있다 -​권이화 시 ‘구름사원의 저녁노래’ 전문

어떤 신화적인 장소처럼 나만의 비의적인 성소라 할 수 있는, 울림이 주는 잔상 위에 잠시 올라 쉼을 얻는다. 돌과 이끼가 피어나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무르고, 다 쓰이지 못한 악보들이 숨을 고른다.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고 환상 속에만 머물지도 않는 경계의 장소다. 누구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 잠시 머물다 돌아오는, 누구에겐가 필요한 어떤 기원과 같은 곳, 이곳에 들면 빙하 속에 잠든 꽃노래도 사랑받던 시절을 지나 얼어붙은 감정의 시대를 통과한 목소리로 마치 꽃잎처럼 다시 엮이고 다른 목소리로 되살아나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언어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따금 나는 긴 꿈속에서 헤맨다. 악몽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반복되고, 깨어나도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눈을 뜨고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한 덩어리 어둠에 눌려 지그시 나를 눈 떠야 할 때, 구름 속으로 번지는 감각 하나, 그 감각의 끝에 서서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을 느낀다. 바람조차 조용히 잠든 고요의 툰드라, 어떤 손으로 기타를 쳤을 찬란한 기억들이 더 아프다. 그러므로 구름사원에는 언제나 끝나지 않은, 완성되지 못한 노래가 머문다.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까지 지켜보는 언어와 같다. 존재의 미세한 흔적을 듣고 기록하는 일과 다름없다. 저녁이면 구름사원에 올라 말 없는 세계의 귀를 대신해 노래를 붙잡는 시인이란 자세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저녁에 가 닿을 수 있으리라는 마음. 그것이 시를 쓰는 이유이며 여전히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로 닿지 않는 자리에도 노래가 스며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