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자꾸 걸어 나가면

김옥전 시인

2025-07-14     동양일보
▲ 김옥전 시인

요즘 몇 개월 동안 걷기에 빠져 있다. 특별히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하거나 운동을 하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걷다 보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을 이해하고 품어 안을 수 없는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어울림누리 운동장을 걷다 보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의 걷기 또는 달리기에는 어디에 목적지가 있는 것일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묵묵히 발자국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숭고함을 넘어 경이롭기까지 하다.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여정이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탐구하며 내면의 거울 앞에 자기를 세워보는 것이다. 그 결과 덜 성숙한 자아를 덜어내고 단단하고 탄력 있는 내면의 근육을 키우는 일은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가치 있고 의의 있는 일이다.
문학에서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일까. 문학인들은 어떤 욕망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일까,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들과 조촐한 만남이 있었다. 나의 첫 시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삶의 시작을 함께 했던 초등학교시절의 아이들이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천천히 걷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평생을 전력질주 한 친구가 말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데 너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남기는구나,
그러나 인간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 단지 어딘가로부터 시작된 존재가 현재를 거쳐 어딘가로 지나갈 뿐이다.
지금 나는 시인이라는 코스를 통과하는 중이다. 시인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시집 출간이 내면의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자아실현 욕구’였는지 아니면 단순한 욕망과 고상한 집착이었는지 내면의 거울 앞에 나를 세우고 응시해 본다. 시인이란 이름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지만 내가 남긴 한 권의 책이 혹여 쓰레기가 되어 우주를 오염시키는 골칫거리가 되지는 않을는지.
‘직탕폭포 찾아가다 길을 잃었네/ 갈길 막힌 물살들이 투신하는 곳/ 투신한 소리들이 계곡을 따라 환생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맨몸으로 섞이고 싶었네//’
섞여서 ‘동굴 입구, 절경’에 다다를 때쯤 허무를 넘고 존재도 넘고 인간이라는 의식도 넘어 세상과 감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완벽한 완주일까.
걷기처럼 글쓰기도 일정한 보폭으로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혼자 갈 뿐이다. 함께 갈 필요도 추월할 이유도 1등을 할 필요도 없다. 걷는 일 이외의 목표가 생기면 욕망이 되고 한눈을 팔게 되고 그러다가 넘어지듯 글쓰기도 그렇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존재하지 않을 것들을 만나 보려고 쓰고 또 쓸 뿐, 다른 생각에 한눈팔면 상처가 된다.
어울림누리 운동장을 나와 국사봉을 걷는다. 내가 밟고 지나가는 무수한 생각들. 별들의 푸른 이마를 씻어주는 바람의 손길, 잠시 멈출 때라고 붉은 눈을 깜빡이는 신호등과 질주하는 새벽의 시간들은 모두 나를 걷게 하는 것들이다.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발가락이 돌에 차인다. 욕망은 집착을 부르고 집착은 아프다는 발가락의 말을 듣는다. 아프고 나니 또 다른 길이 보인다. 나는 발의 길을 따라가 본다. 우리의 목표는 나의 목표는 ‘시집’이 아니라 ‘시’를 만나는 것이다. 시가 오는 순간을 기다리며 마중 나가는 길에서 새로운 오브제를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