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23>
압도적 표 차로 연병호 꺾고 국회의원 당선
◆ 국방장관 이기붕의 보좌관이 되다
국방부 총무국에서 안동준이 담당한 업무는 정훈국 창설이었다.
당시에는 미군 측의 반대로 ‘정훈’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제2국’이라고 불렀다. 국장은 송면수였다.
원래 이범석이 국방부에 설치한 것은 ‘정치국’이었다. 그러나 미 군사고문단에서 ‘정치국’을 두고, 나치 독일이나 공산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국방부장관 직속의 정치장교단 설치에 반대했다. 결국 이범석이 물러난 뒤 정훈국은 육군본부 정훈감실로 흡수 통합됐다.
안동준은 정훈장교 200명을 직접 선발하는 등의 실무 역할을 담당했다. 정훈국을 창설한 뒤에는 국방부 제1국(육군국) 차장을 거쳐 육군참모학교 인사 교관으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1기생 교육을 마치고 2기생 교육을 준비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시기 안동준은 주로 부산의 육군본부에 있었다. 인사국 사제과장으로 있으면서 대령으로 승진했고 이어 국방부장관 이기붕의 보좌관이 됐다.
이기붕과의 만남은 안동준에게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계 진출의 발판이 놓였기 때문이다. 이후 안동준은 육군대학과 미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졸업하고 국방부 제1국 부국장을 거쳐 1953년 11월 정훈부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3개월여 만에 4대 총선 출마를 위해 예편함으로써 4년 반 남짓한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4년 6개월여 동안 소위에서 대령까지 진급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꿈도 꿀 수 없고,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땐 그것이 가능했다.
조국을 지킬 강군을 꿈꾸었으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일어났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장성 진급을 앞두고 그의 꿈은 정치로 향하게 됐고, 여기엔 이기붕의 역할이 컸다.
◆ 정계로 진출… 자유당에서 활동
안동준의 정계 진출은 이기붕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이기붕은 1953년 11월 자유당 총무부장에 임명돼 족청계 숙청을 비롯한 당 개조작업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국민회·족청·대한청년단·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해 관제데모를 부추겼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장관, 원용덕을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임명하고 야당의원들을 체포해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전란 중에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재집권했다.
이때 개헌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 이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이범석이 자유당의 부통령후보가 됐으나 이것이 이승만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승만은 이범석의 족청계가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 도중 무소속 함태영을 런닝메이트로 지지해 당선시키고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했던 것이다.
족청계 숙청에 앞장 선 이기붕을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된 당 지도부는 1954년 5월 20일 총선을 통해 관료 출신 등 신진 인물들을 진출시킴으로써 인적 교체를 마무리지으려 했다. 그런 점에서 안동준의 발탁은 자유당 개조작업의 일환인 동시에 당내에서 이기붕 세력을 구축하는 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 연병호 꺾고 국회의원이 되다
안동준은 예편하자마자 자유당에 입당해 훈련부 차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1954년 5월 20일 열린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괴산을 지역구로 입후보했다. 상대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연병호였다.
한때는 그를 도와 당선시켰지만, 정치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었다.
안동준은 3만451표를 얻어 연병호를 2만여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현격한 표 차이였다. 그만큼 민심이 안동준에게 기울었다고 할 수도 있었고, 자유당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압도적 표차를 이끌었다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안동준의 당선은 군 출신으로 정계에 진출한 첫 번째 사례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때 안동준과 함께 국회에 진출한 군 출신 인사로는 김정호, 박종길, 김성삼 등이 있었다.
이후 안동준은 자유당 의원부 운영위원으로 활동했고 1954년 12월에는 총무부차장에 선임됐다. 1955년 8월엔 재개원한 자유당 중앙정치훈련원의 부원장직을 맡아 당원 교육에도 열성을 쏟았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고 군인의 길을 걸었던 그는, 특히 의정활동에서 농정과 국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5, 6, 7대 의회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그는 국회 대정부 질의를 통해 군의 후생사업과 미곡 문제 등을 파헤치고 1955년 불온문서투입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특별조사위원에 임명돼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의 증언을 청취했다.
또 제대장병보도회 부회장에 선출돼 상이제대군경의 김포 정착 농장을 시찰하기도 하였다.
초선 의원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안동준은 1956년 2월 25일 국회 상임위원장 선거에서 국방위원장에 당선됐다. 초선으로서 상임위원장을 맡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경쟁 후보는 전임 국방위원장인 자유당 소속의 유지원이었다. 대한청년단 출신인 유지원은 자유당내 비주류파로 이기붕 세력과 대립했다. 안동준은 107표를 얻어 62표에 그친 유지원을 물리쳤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