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양성평등, 늦게 피어도 반드시 맺는다
박희순 충북도농업기술원 연구사
대추 꽃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는가? 마치 연둣빛 노란 작은 별들이 나무에 내려앉은 듯하다. 대추밭에는 지금 마지막 꽃이 피고 동시에 작은 열매가 부지런히 맺히고 있다.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두 달 동안 꽃을 피우는 대추는 4월이면 꽃이 피는 다른 과수에 비해 한참 늦은 지각생이다. 옛사람들은 이런 대추나무를 '양반나무'라고 불렀다. 봄이 되어도 4월 중순이 지나서야 천천히 잎을 내는 모습이 마치 느긋하고 신중한 양반의 걸음걸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동국세시기'에는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는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이나 단오에 대추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뿌리로 향하는 양분 이동을 막거나, 줄기에 상처를 내어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이다. 지금의 ‘환상박피(環狀剝皮)’와 유사한 농사법이다.
대추는 일단 땅에 뿌리를 잘 내리면 해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예로부터 대추는 풍요와 번영,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우리 전통 혼례에서는 폐백을 올릴 때 신부가 시부모에게 절을 드린 후, 시부모는 신부에게 대추와 밤을 던지는 풍습이 있다. 이는 자손을 많이 낳고 집안을 번성하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제 폐백은 더 이상 혼례의 필수 절차가 아니다.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퍼지고 젊은 세대들의 결혼 기피와 혼례 간소화 추세 속에서 폐백은 옛 풍습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대추 농사는 일 년 내내 손이 많이 가는 작목이다. 전정, 순 정리, 수확, 선별, 건조, 포장까지 어느 하나 수고롭지 않은 과정이 없다. 이 모든 과정에서 여성 농업인의 역할은 크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 농업인은 여전히 ‘주인의 아내’ 혹은 ‘돕는 일손’으로만 여겨진다. 농업경영체 등록, 정책 지원 대상자 선정, 심지어 농업기술 교육의 수혜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변두리에 머무르고 있다. 함께 일하고 같은 농장을 꾸려가면서도 공식 기록과 권리 체계 안에서는 이름조차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농업 경영주 중 여성의 비율은 약 23.5%에 불과하다. 여성 농업인은 여전히 ‘보조자’의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50대 이상의 여성 농업인은 실질적인 농장 운영과 생산의 중심축임에도 불구하고 의사결정에서 소외되거나, 공적 지원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많다. 대추 주산지인 보은 지역에서도 여성 농업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실제로 대추 선별, 세척, 포장 등의 품질 관리 과정에서는 여성의 손이 빠짐없이 필요하다. 그러나 작업 환경의 열악함, 노동 강도에 비해 낮은 임금, 농기계 접근성 부족 등은 여전히 여성 농업인이 현장에서 겪는 대표적인 고충으로 남아있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대추를 재배하는 현장에서조차 여성 농업인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순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농촌의 구조적 불균형에서 비롯된 결과다.
늦게 피어도, 풍성한 열매를 맺는 대추처럼 함께 땀 흘린 이들이 정당한 인정을 받고 공정한 구조 속에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양성평등은 농촌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닌 지금 당장 실현돼야 할 필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