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장] 교제폭력 수사 처벌제도 개선 절실
대전 도심에서 흉기로 전 연인을 살해한 뒤 도주한 20대 남성 용의자가 사건 다음 날 경찰에 붙잡혔다. 앞서 피해자는 그를 네 차례나 경찰에 신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살인 사건 이전 경찰의 피해자 보호 조치에 비판이 제기된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대전 서부경찰서는 지난 30일 대전 중구 산성동 한 지하차도에서 용의자 A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A씨는 체포 직전 도주 차 안에서 음독을 시도해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전날 낮 12시 8분쯤 서구 괴정동의 한 빌라 앞 길가에서 교제하던 30대 B씨를 흉기로 살해하고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휴대전화와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현장에 버리고 도주했다. B씨는 경찰의 공조 요청으로 출동한 119구급대에 의해 심정지 상태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이에 경찰은 A씨 가족과 지인 등을 상대로 탐문 수사를 벌였다. 인근 폐쇄회로(CC)TV 영상 자료를 분석해 A씨가 차량과 오토바이를 번갈아 타고 도망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동선을 추적한 끝에 검거했다. 경찰은 "A씨의 건강 상태가 나아지는 대로 살해 동기와 경위를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앞서 B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지난달 사이 네 차례 A씨를 경찰에 신고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지난해 11월 1일 식당에서 B씨와 다투다 그릇을 파손한 혐의(재물손괴)로 형사 입건됐다. 다음 날 B씨는 "A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간 뒤 가져오지 않는다"며 절도 혐의로 신고했다. 같은 날 B씨는 "A씨가 집 안에 허락 없이 들어와 부동산계약서와 물건을 가져갔다"며 주거침입으로도 신고했다. 경찰은 같은 날 B씨가 한 신고 두 건을 놓고 절도 및 주거침입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 B씨에게 설명하고 A씨를 입건하지 않았다. A씨는 지난달 27일에는 주거지 인근 편의점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B씨를 때리고 소란을 피운 혐의(폭행 등)로도 형사 입건됐다.
경찰은 B씨의 네 차례 신고에 적절한 대응을 했고, 보호 조치도 권유했지만 B씨가 응하지 않아 강제할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B씨에게 수차례 스마트 워치 착용 등 보호 조치를 권하고, 피해자 조사를 위해 출석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APO(학대·가정폭력 전담경찰관)가 범죄예방·보호를 위해 B씨에게 세 차례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고, 안내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항변했다.
하지만 네 차례나 다툼으로 신고가 접수된 만큼 경찰이 피해자 보호에 능동의 태도를 보였다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교제 폭력은 ‘연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공권력은 개인 간에 해결해야 될 일이라며 적극적인 개입을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교제 폭력 건수가 급증하고 내용 또한 다양화됐다. 심지어 살인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흔하게 됐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교제 폭력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정확한 피해 규모를 헤아리기 어렵고, 피해자를 위한 법적 보호 장치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렇다 보니 피해자들은 하소연할 데가 마땅치 않다.
또 교제 폭력은 주로 폭행·협박죄로 입건하는데 반의사불벌죄여서 피해자가 처벌불원서를 내면 처벌을 받지 않는다. 가해자의 회유로 피해자는 처벌불원을 거듭하다 결국 살해되는 경우까지 일어나고 있다. 반의사불벌 조항을 폐지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교제 폭력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무엇보다 연인 간 폭력을 흉악 범죄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해외의 경우 데이트 폭력 피해자를 가정 폭력 피해자와 동일선상에 두고 적극적인 보호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선 교제 관계 피해자도 가정 폭력 피해자와 동일하게 보호하는 법적 조항이 마련돼 보호받고 있다.
일본은 2010년대 초반부터 배우자폭력방지법의 적용 대상을 ‘주거지를 공유하는 교제 관계’로 확대해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전 발생요인을 제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도 피해가 경미한 단계부터 수사기관의 선제적 개입으로 잠정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제 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제도적·법적 장치를 마련해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