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펄떡이는 붉은 소리

방병철 단양군 정무보좌관

2025-08-07     동양일보
방병철 단양군 정무보좌관

말이 지워진 자리에 귀가 자란다. 귀는 벽처럼 보이지만 경계가 없다. 소리를 삼킨 침묵이 그 안에 머문다. 울지 못한 말들이 안쪽으로 스며든다. 그 침묵 아래에서 심장은 뛴다. 펄떡인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붉은 것이 자라고 있다. 혈관이 아니라 마음의 결, 끊어진 말의 근육들이 조용히 몸속을 건너간다.
단양이라는 말은 땅보다 먼저 사람에게서 솟는다. 누군가의 어깨에서, 목 뒤의 체온에서, 마치 들이마신 숨처럼 서서히 올라온다. 지도에 찍히기 전, 발에 밟힌 흙의 숨결로, 피부를 스친 바람의 실루엣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들은 눈보다 먼저 깨어나는 감각으로 일어난다. 불 꺼진 창 안에서 자기 빛을 덜어 타인의 얼굴을 밝혀준다. 문은 닫혀 있지만 마음은 스스로 열려 있다. 기다림이란, 자신을 조금씩 벗겨내는 일임을 안다.
그림자는 그들 아래 길게 드리워진다. 그들은 그림자보다 느린 걸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조심스레 지난다. 먼저 웃지 않고 먼저 울지 않지만, 누구보다 먼저 그 자리에 와 있다. 누구보다 오래 그 곁에 머문다.
그들은 길을 따라 걷지 않는다. 걸음 하나하나가 길을 만든다. 조용히 흘러내린 땀으로 땅이 젖고, 축적된 정적이 하루를 단단하게 붙잡는다. 오래된 손으로 하루의 구석을 잡아당기며, 주저앉지 않은 채 오래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시간은 그들 곁을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을 눕히고, 그 등을 다독이며, 달력보다 먼저 누군가의 얼굴에서 변화의 기미를 읽는다. 말로 채워지기 전, 눈빛 하나로 기류를 감지한다.
비가 오면 입술은 다문 채 고요해지고, 바람이 불면 더 낮은 소리로 마음을 나눈다. 그 속에서 눈은 발이 되고, 손은 언어가 된다. 입 대신 귀로 말을 듣고, 속도 대신 호흡으로 기척을 알아챈다.
그들은 종이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는 하루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은 끝내 그들을 담기에는 언제나 작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별곡리 300번지 사람들'이라 부른다. 주소가 아니라, 언어의 결이 가장 정갈한 지점이다.
그들은 묻지 않음으로 품고, 되묻지 않음으로 오래 남는다. 기울어진 목덜미와 두 손 모은 자세 속에 한 마을이 버티고 있다. 작고 조심스러운 마음들이 물 아래 피는 수초처럼, 조용히 자라난다.
그들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처마를 떠받친다. 보이지 않는 시선 하나로 저무는 하루를 지탱하고, 굳게 닫힌 마음 하나를 따뜻한 손끝으로 연다.
우리는 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붉음을 속에 묻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 감추고 있는지를.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하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얼마나 오래 자신을 지워왔는지를.
별곡리 300번지 사람들. 그 조용한 몸짓은 오늘도 단양의 무게를 들어 올린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들을 닮아 조용히 말하고 있다. 조용하다는 것은, 끝까지 피고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