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27>

굴곡과 격랑 속에 놓인 정치인의 삶

2025-08-07     김명기 기자
▲ 방일 사절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안동준(맨 오른쪽). 사절단에는 젊은 시절의 김대중(맨 왼쪽) 전 대통령의 모습도 보인다.

◆ 당 정책위 부의장으로 큰 활약
3선 의원으로 정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안동준은 1965년 12월 31일 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에 임명됐다. 그는 6대 국회 임기 후반기 동안 당 정책위 부의장으로서 정부・여당 경제정책심의회의에 참석해 각종 경제 현안들을 협의하고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할 당시엔 정부안에 대한 공화당의 수정안 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만큼 국회에서 그의 비중은 컸다.
그런 와중에 여당인 공화당에선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2인자로 불렸던 김종필이 있었다.
안동준은 김종필 중심의 주류파에 대응하는 비주류파, 또는 ‘반김계 온건파’로 분류됐다.
반김계 온건파는 장경순 국회부의장계와 5월동지회, 구자유당계, 그리고 중도파가 연합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여러 계파가 이합집산한 탓에 결합력은 느슨한 편이었다.
안동준은 1964년 8월 당 개편을 앞두고 당내 서클 양성화와 사무국 폐지, 집단지도체제 도입 등 총재에게 제출할 5개 항의 건의안 서명 작업을 주도했다. 또 1964년 11월 전당대회 때는 부총재제 신설과 함께 사무국을 폐지하고 당 기구를 위원회제로 변경하는 당헌 개정안을 당무회의에 제출했다.

◆ 깊은 인상 받은 이스라엘 시찰
몇 차례 해외 시찰에 나서게 된 안동준에게 특별한 경험이 된 나라가 있었다. 이스라엘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1965년 5월 7일부터 18일까지 이스라엘의 농촌을 둘러봤다. 그 곳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후일 안동준은 이스라엘의 체제를 표본으로 한국의 농촌을 개혁하려 시도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었다.
‘키부츠’와 ‘모샤브’는 그가 추구하는 농정의 방향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일본의 야마기시즘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와 관련해선 추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안동준은 귀국 후 경향신문에 이스라엘의 전천후 농업을 소개하는 글을 투고했다. 그리고 1966년 12월 직접 경험한 내용과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교학사)을 출간했다.

◆ 4선 중진인데 공천서 탈락
당과 의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안동준은 7대 총선에서 공화당의 공천을 받는 데 성공했다. 안동준의 당내 경쟁자는 4대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김원태였다. 1966년 9월 괴산지구당에서 핵심 당원들이 집단 탈당하는 등 두 사람의 경쟁은 일찍부터 과열 양상을 보였다. 결국 안동준이 공천자로 내정되고 김원태는 무임소장관에 임명됐다.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총선에서 안동준은 신민당 후보인 김사만을 1만2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드디어 4선 의원이 된 안동준은 당 예산심의특별위원장에 임명됐다.
공화당에서는 두 명의 정책위 부의장 중 한 명이 예산심의특별위원장을 겸했는데 공화당의 예산심의특별위원장은 관례적으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위원장에 선출됐다.
공화당이 마련한 국회 예결특위 위원장의 조건은 의회 경험이 있고 계수에 밝으며 대야 관계에서 모가 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동준은 7대 국회 후반기에도 이 직책들을 유지했다.
당과 국회에서 예결산 관련 실무를 총괄하게 된 안동준은 정부‧여당 연석회의에 참석해 예산안과 세제개혁안 등을 검토하고, 국회 예결위에서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종합 심사했다. 그리고 야당 측과 협상해 세부 항목과 금액을 조정했다. 1969년 5월에는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3차경제개발5개년계획심의회 심의위원에 위촉됐다.
이 밖에도 국회의사당 신축 결의안 서명 작업을 벌여 10억원의 신축비 예산을 확보하고 국회의원상조연금법 발의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처럼 7대 국회 들어 안동준은 당과 의회에서 정책통이자 중진으로서의 입지를 착실히 다졌다.
열정적으로 국회 활동을 하고 당내 입지도 공고하게 다졌지만, 그럼에도 1971년 8대 총선에서 괴산 지역구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자유당 시절부터 괴산은 여당 내 대표적인 경합지구였다. 이때도 안동준과 김원태의 경쟁이 치열했다. 당무회의 심사에서 안동준을 내정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1971년 1월 16일 총재의 결재를 거쳐 최종적으로 발표된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안동준 뿐 아니라 국회 상임위원장급 9명을 포함해 현역 의원 41명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충격적인 결과였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