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최초의 주갑기념비, 김학경의 이충무공임진륙주갑기념비
이상주 전 중원대교수
첫째,“시대에 충성한 사람을 또 찾아냈다”.많이 보고 듣고 묻고 찾은 결과다. 김학경이다. 1940년 외천국민학교를 창설할 때 부지와 건축비를 기부했다. 2025년은 일제로부터 주권을 찾은 광복80주년(週年)이며, 김학경(金學瓊1893~1965)서거 1주갑(60년)이 된다.이에 그분의 덕을 기리고 그가 세운 기념비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자, 이번 광복절기념으로 소개한다. 그는 한문한글겸비세대로 선각자다.
둘째, 2016년경 조용민사장과 공부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비석과 암각자를 촬영해설하여, 그의 블로그“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에 올린다. 충북에서는 그 분야의 최초다. 필자에게 상당구 가덕면 백족사암벽의 “山神岩,恩授岩”,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의 “행서(行書)인 醉臥溪”에 대해문의했다.“시냇물이 구비구비 흐르는 모양을, 술에 취해 누워있는 시내(취와계)”라고 이름붙였으니, 그 문예표현이 절묘하다.학문이 높은 최흥림(崔興霖1506~1581)이 은거했던 곳이니, 그가 새겨놓은 듯하다.미원면 가양리“弄琴巖,相揖岩”도 필자의 글을 통해 알게됐다.
셋째, 그는 필자에게, 비석이나 암각자가 있으면, 알려달라했다. 가덕면 병암리 개울가암벽의 “南無阿彌陀佛”를 알려줬다.1992년 미륵사불상과 백족산산신당을 조사차 가본 후 휴식차 다니곤했다.2005년경 개울가수직암벽에 암각자가 있을 듯하여 살펴보다가 발견했다.『청원군지』등에 미수록된 듯하다. 그가 2021년12월8일 올렸다.
넷째, 필자는 그에게, 한글로 새겨놓은 비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요청했다.1963년에 건립한 괴산군 문광면 유평리“李海順褒孝碑”만 알려주었다. 감사하다하고 고향인근마을 산기슭에 있어서 바로 가보았다. 3면은 모두 한자로 썼다. 오른쪽면에 두 줄의 한글로 효를 준창한 비라고 내용을 요약했다.이해순은 1536년 현존최초의 한글비“한글영비(靈碑)”를 새겨세운 이문건(李文楗1543~1620)의 후손이다.견문의 수준이 응용창의력의 수준을 증명하는 일례이다.
다섯째,조용민이 조사하여 브로그에 올린 다음내용을 보자.“전면에는 한글로 "이충무공임진륙주갑기념비"라고 적혀있으며 좌우면에는 '충관일월 효감빙상' … 석물의 건립시기는 단기4285(서기1952년)입니다.무슨 뜻인가?하고 한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혹시나하고 육십갑자 6번을 생각하고 이충무공을 연관을 시키니 임진왜란이 일어난지육주갑(60*6=360) 계산을 해보니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난지 360년 되는 날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장군을 잊지 말자 하는 뜻으로 1592+360=1952년에 세운 석비입니다.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한글로 새겼읍니다. 글은 외천초등학교 설립자인 김학경선생이 지었으며 글씨는 임종태가 새겼다.”
여섯째,“충관일월(忠貫日月)효감빙상(孝感氷霜)”은“충성심은 해와 달을 꿰뚫었으며, 효심은 얼음과 서리를 감동시켰네”라는 뜻이다.천지신령님,조상님과 김학경님의 영령께서, “최초의 주갑기념비”로 소개하라고, 인연을 맺어주셨다.
일곱 째,김학경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감재식(金在植1860~1928)의 둘째 아들이다. 김재식은 1904년 남이면 외천리에 귀향했다가,지금의 부용면 부강리에 정착했다. 2015년 《열상고전연구》52호에 〈김재식의 향거사시즉사에 대한 고찰〉을 실렀다. 김재식이 지은 〈끽와거(喫萵苣)〉는“고추장 상추쌈밥을 싸먹은 최초의 한시(漢詩)”이다.세종시에서 동영상을 제작하여 U튜브에 올렸다.
여덟째,1955년 광복10주년기념 사기(砂器)재떨이가 남아있다.1~10주년 단위로 기념행사를 했다는 증거이다. 김학경이 6·25전쟁기간중에 이 비석을 건립한 이유는, 학생, 교직원, 주민들에게, 이순신장군처럼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라는 정신을 암기실천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김학경은 시대에 충성했다."이충무공임진륙주갑기념비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6주갑을 기념하여, 건립한 최초의 비석이자, 한국 최초의 주갑(周甲)기념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