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내 몸의 진주

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기생생물세계은행장

2025-09-01     동양일보
▲ 엄기선 충북대 의대 명예교수·기생생물세계은행장

진주는 기생충과 싸워 이긴 조개의 전리품이다. 사람들은 진주를 단순히 아름다운 보석으로 여길 뿐, 그 속에 숨겨진 생존의 이야기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진주는 조개가 기생충이나 이물질과 치열하게 싸워 얻은 보물이다.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이다.



1970년대 해양생물학자들은 진주 형성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냈다. 조개 내부에 기생충이나 모래알 같은 이물질이 침입하면, 조개의 면역세포인 헤모사이트가 즉각 출동한다. 이들은 침입자를 둘러싸고 두꺼운 캡슐로 포장하며 저항한다.



이 과정에서 진주층을 분비하는 조개의 외투막 조직에 자극이 가해지면 곧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조개는 침입자를 탄산칼슘과 콘키올린으로 층층이 에워싸고 둘러치며, 마침내 눈부신 진주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면역반응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생체 결과물 중 하나이다. 외부 침입자에 맞선 조개의 방어 기제가 뜻밖에도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보석을 탄생시킨 것이다. 진주는 조개가 생존을 위해 기생충과 벌인 전쟁의 전리품이자, 면역의 가시적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생충과 인간 사이의 면역전쟁은 어떨까? 인간 역시 조개와 마찬가지로 무수한 기생충들과 공존하며 살아왔다. 특히 '토종기생충(heirloom parasite)'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우리 인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토종기생충은 인류와 그 조상들이 진화 과정 전반에 걸쳐 공존해온 이웃 기생충들을 지칭한다. 우리 주위의 많은 동물과 가축에 퍼져 있는 동물 회충류, 동물 편충류, 동물 구충류 등의 여러 기생충 사촌들이 바로 그 예이다. 이 기생충들은 사람에게 들어오면 제대로 된 호적 숙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면역계를 자극한 후 더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



이들 토종기생충의 역할을 단순히 해로운 존재로만 볼 수 없다. 수만 년간 인간과 공진화해온 이들은 우리 면역계를 훈련시키는 교관 역할을 해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들 기생충과의 오랜 상호작용은 인간의 면역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발달시켰으며, 특히 알레르기나 자가면역질환을 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사회에서 과도한 위생관리로 인해 여러 미생물·기생충과의 접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히려 알레르기 질환이나 자가면역질환이 증가하고 있다는 이론이 있다. 토종기생충들이 우리 면역계의 균형을 맞춰주는 조절자 역할을 해왔는데, 이들의 부재가 새로운 건강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이론, 즉 '위생가설'이다.



결국 조개가 기생충과 싸워 얻은 보물이 진주라면, 인간이 여러 기생충과 싸우며 얻은 보물이 바로 면역이다. 하지만 이 면역이라는 보물이 진주와는 달리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많은 미생물 즉 세균과 바이러스, 그리고 각종 기생충들과 조우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병에 걸리지 않고 면역학적으로 내치며 건강하게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진주, 즉 면역의 힘이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백신 접종은 이러한 면역적 보물을 더욱 빛나게 하는 기술이다. 조개가 자연스럽게 진주를 만들듯, 우리의 면역계 역시 끊임없는 학습과 적응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다. 다만 조개의 진주가 수년에 걸쳐 완성되듯, 우리의 면역 역시 오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를 환기해야겠다. 진주를 만드는 과정이 조개에게 고통스럽듯, 인간의 면역 획득 과정도 때로는 질병이라는 고통을 수반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생각할 때, 기생충학의 발전은 새로운 치료법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토종기생충들과의 관계를 재조명하여, 면역치료나 알레르기 치료에 활용하려는 연구들도 이미 시작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멀리하려 했던 기생충들이, 미래 의학의 새로운 동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개 속 진주가 빛나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몸의 면역이라는 진주를 떠올려보자. 그 진주는 진짜 진주보다 훨씬 더 귀하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가장 소중한 생체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주라는 이 보물은 유전체의 복제라는 형식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 자연의 위대한 섭리가 지구촌의 금수저 족보, 호모 사피엔스에 주는 억겁의 축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