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샤갈과 걷는 시의 풍경
권이화 시인
샤갈과 함께 전시실을 걷는다. 조용히 관람자를 바라보는 그의 그림은 눈부시다. 시선을 사로잡는 색채와 구도는 고요한 심상에 강렬한 파문을 일으킨다. 웃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날아오르는 붉은 여인이나 유리창 너머 거꾸로 선 집, 공중에 붕 떠 있는 악기들은 신비롭고 시적이다.
샤갈은 자신의 그림을 “기억과 색채의 공존”이라고 했다. 그림이 개인의 기억과 감정을 환기하는 시각적 언어임을 암시한다.
이는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시는 경험한 현실을 빌려 상상의 세계를 세우고 그림은 상상 속에 기억의 현실을 녹여 이미지를 구축한다.
둘은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이미지라는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생일'이나 '푸른 빛의 서커스'는 삶을 토대로 그려졌으나 그 위에 덧씌워진 색과 구도는 시가 보여주는 추상적 세계에 가깝다. 아무도 ‘저 염소는 왜 초록색일까?’ 묻지 않고 누구나 그림 속 초록 염소가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
관람자는 대체로 그림 앞에 오래 서 있다. 정열적인 붉은 톤이나 짙고도 푸른 색조에 구성된 환상적인 풍경, 또는 해체되어 다시 모인 기호들은 불가사의하면서도 황홀하다. 그리고 '마술피리의 기억'에서 음표를 지나가는 아리아의 이동을 화가의 시선으로 체험하게 된다. 음악의 선율이 따스하게 빛으로 번지는 감정의 온도다. 그것은 마술피리를 불며 언어의 색채와 구도로 재구성될 이미지를 불러낸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체들은 대체로 부유하는 구조로 매우 몽환적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아늑하다. 고향 같은 공동체의 모습이며 천사의 품 같은 음악의 안식처다. 또한, 그 상상의 공간에 정지해 있는 이미지를 지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눈길은 새로운 비유와 상징의 언어로 되살아나려 한다.
존 키츠는 전시실에서 본 고대 도자기에 새겨진 이미지에 감탄하여 침묵의 형상에 부치는 시를 썼다.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다. '그대, 여전히 순결한 말 없는 신부여/침묵과 느린 시간이 길러낸 의붓자식이여.' (송가 1. 1연 1, 2행) 이른바 에크프라시스라는 시적행위다. 시각예술을 언어예술로 풀어내는 기법이지만, 이미지가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이미지에서 무엇을 느꼈는가다. 이미지가 언어의 잠재력을 끌어냈다면 언어의 물감은 말 없는 여인의 실루엣을 타고 나풀거린다. 샤갈의 그림은 그 자체가 시이면서도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시로 변주될 가능성을 무한히 품고 있다.
시가 화가를 사랑하듯 마르크 샤갈도 시인을 사랑했다. 그는 파블로 네루다를 좋아했고 폴 엘뤼아르와도 교류했으며 스스로를 “내가 그린 것은 현실이 아니라 사랑이다. 색으로 쓴 내 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말처럼 샤갈의 회화적 태도는 작품 전반에 드러난다. 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오페라 하우스의 천장화, 리스의 지중해 마을까지 그 연작을 걷다 보면 그림 속의 중심 없는 구도와 반복되는 상징, 내러티브 없는 병치가 초현실적인 입체적 시공간을 형성한다. 사람과 동물, 꽃, 악기, 바다가 들려주는 상징과 은유는 시의 붓으로 그린 명화다.
그의 그림에는 유년 시절의 비텝스크 마을과 유대인으로서의 애환, 아내 벨라와의 사랑, 전쟁과 망명, 죽음의 기억 등 긴 삶의 여정에서 오고 간 행복과 고통의 세계가 공존한다. 하지만 사진 속 말년의 인상은 사랑 그 자체에 가깝다. 자신의 고백처럼 그림은 사랑이자 시였으므로 수많은 사랑을 한 편 한 편 그림으로 승화시킨 결과다. 그것은 일생에 걸쳐 이루어진 수행이었으며 어떤 종교적 고백보다 더 높은 숭고함을 담고 있다. 성자 같은 그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