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에스프레소 잔
하재영 시인
오래전 초청을 받아 어느 아파트 가정을 방문했을 때였다.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약방의 감초처럼 여행 이야기는 이어졌고, 그 말끝에 주인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것은 동유럽 여행 중 구입한 병따개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모양과 크기가 조금씩 다르고, 색상도 다양했다.
“한두 개 수집하다 보니 이젠 습관처럼 해외에 나가면 그 나라 병따개를 찾게 되죠.”
그가 수집한 병따개는 100여 개 넘는 것 같았고, 그중 몇 개를 골라 액자로 만들어 벽면을 장식한 것이다.
아직도 그분이 병따개를 수집하고, 그것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여행지의 낯선 풍물을 즐기며 이색적인 무언가를 찾아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음식 맛을 보고, 기념될 만한 것을 구입한다.
사실 찾았던 곳에 대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 사진이나 기념품만큼 훌륭한 것은 드물다.
나도 해외여행 중에 사진 촬영은 물론이고 기념이 될 만한 소품을 찾았다. 1990년대 중국 여행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많은 나라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작은 엽서 그림과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할 볼펜을 골랐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컵 한두 개를 귀국행 여행 가방에 넣기 시작하였다. 박물관, 미술관, 카페, 시장을 돌아다니다 발길을 멈춘 곳은 찻잔이 있는 곳이었다. 그 이면에는 오랜 시간 커피를 즐긴 영향도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좋아한 커피는 지금도 하루 한두 잔 이상 마시는 기호식품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러 들른 카페에서 그곳에 전시한 잔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도 생겼다.
잔의 형태도 가지각색이었다. 여러 종류의 잔 중에서도 난 에스프레소 잔에 관심이 높았다. 앙증스럽게 작은 것이 매력적으로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집한 것이 10여 년 되었다. 병따개를 수집한 사람처럼 나도 처음에는 잔을 볼 때마다 이것은 일본, 저것은 스페인 등 나라를 가리키며 잔의 출생지를 떠올리고 찾아온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그 의미 자체가 조금 시시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소유에 대한 성찰이랄까.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을 소유하는 일은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필요한 책을 사고, 식기를 사고, 더 나아가 집을 사는 일은 분명 필수불가결한 일이고, 소유 욕구를 만족시키는 행위다. 거기에 액세서리처럼 멋과 운치를 더하는 일은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는 여유로움이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아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수집에 관심을 둔 대부분 사람들이 부딪히는 갈등일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추억을 되새기며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분명 소유에 대한 만족이고 보상이다.
몇 년 전부터 미니얼라이프를 꿈꾸는 미니멀리스트가 내 주변에 많아졌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쓸데없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소유로 가려는 그들의 삶을 맘으로 응원하면서도 내 삶의 습성이 거기까지 가는 데는 어렵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든다.
무소유로 사는 삶이 에스프레소 잔을 소유하고 만지는 욕심보다 더 큰 욕망 같기 때문이다.
내일은 얼마 전 해외여행 중 구입한 에스프레소 잔 하나를 꺼내 거기에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셔야겠다. 그런 작은 일이 내 생활을 맛깔스럽게 하는 동력이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무소유는 신기루처럼 참 멀리 있는 내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