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어느 ‘극단주의자’의 죽음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자유주의 사회는 다양한 의견을 보장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때로 1인 시위를 통해 그 생각을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이런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와 자유를 외쳤고, 그러는 중에 독재정권의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가거나 죽음을 맞기도 했다. 그만큼 소중한 것이 표현의 자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표현의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그 표현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상징 폭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일정한 제약이 따른다. 요즘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악용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서 개인의 자유를 상징하는 표현의 자유가 소홀히 다루어질 수는 없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다녀가면서 ‘종교탄압’을 말했던 미국 평론가 찰리 커크가 연설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비극이고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내놓으면 된다. 그런데 그 범인은 총격으로 응수했고, 법적으로 총기 사용이 허용되는 나라에서 갈등이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우리 못지않게 정치적 대립이 심각한 미국에서 커크의 죽음과 애도를 둘러싼 논쟁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자신의 측근이었던 커크의 죽음을 애도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죽음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은 미국에 올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거기에 오래 전 폐기된 사형제를 부활시켜 워싱턴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으며 격앙되었을 그의 마음에는 공감하지만, 그와 함께 그 죽음의 배경에 깔린 극단적인 대립을 반면교사로 살펴볼 필요도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원성에 기반한 관용의 윤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때 관용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긴장하게 된다. 그 긴장은 깊은 생각으로 이어지는 뇌의 회로가 아니라 즉각적인 반응의 회로에서 오는 것이다. 그럴 때 잠시 멈추고 물러서서 왜 그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일차적인 역량이다. 그런 노력은 내 생각을 다른 사람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민주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말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필요에 따라 그 이야기를 글로 기록하거나 매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하루를 꾸린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본래 수다쟁이라거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다. 뇌과학의 최근 성과는 그 사실을 지속적으로 검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도 중요한 이야기를 만드는 말과 글은 편향성과 방어적 공격성의 표현 수단으로 쉽게 전락하곤 한다. 누군가의 말이나 글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격할 말을 생각해 낸다. 그런 상징적 힘을 담은 공격들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데로까지 넘어선다. 말싸움을 하다가 몸싸움으로 바뀌는 일이 많은 것도 그런 증폭성 때문이고, 이번 찰리 커크의 총격으로 인한 죽음에도 그런 연속적인 폭력성이 자리하고 있다.
찰리 커크는 우파적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미국 교수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미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나쁜 사람’이라고 공격했다고도 한다. 그의 우파적 성향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좌파적 성향’이라는 말과 대응을 이루는 개념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우파적 기독교인’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좌우의 두 날개를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날 수 있는 요건으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지점은 그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생겨난다. 그 태도는 조금씩 과격한 발언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듯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런 비극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정치권에도 그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거대 양당을 대표하는 자리까지 오르고 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소리치는 격앙된 외침이 정치권을 오염시키고 있고, 그 오염은 우리의 일상을 휘젓는 소음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 권력을 준 것은 바로 우리 시민들 자신이다. 그들에게 주목하는 대신에, 합리적이면서도 관용적인 정치인들에게 정당하게 주목할 수 있을 때라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들의 의도한 듯한 격앙된 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편향성과 폭력성, 공격성을 비추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먼저 자신을 성찰하면서 그 결과를 다른 동료 시민들과 나누며 바른 정치참여를 꾀하는 것만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