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우륵의 가락이 이끄는 길

김미옥 시인

2025-10-19     동양일보
김미옥 시인

지난 9월 말, 충주는 우륵문화제로 들썩였다. 악성 우륵의 혼을 기리는 가을 축제는 음악과 사람, 그리고 책으로 한껏 물들어 있었다. 행사장은 북적였고, 곳곳에 마련된 부스마다 웃음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우륵책방’이라는 공간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지역 문인들의 책을 모아 무료로 나누는 자리였다. 낡은 책 냄새와 새 책의 종이 향이 뒤섞여 흘러나왔고, 책장을 넘기는 이들의 얼굴에는 오래된 벗을 다시 만난 듯한 미소가 번졌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었다.

축제의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가락처럼, ‘작가와의 만남’이 이어졌다. 사화자의 매끄러운 진행으로 수필가선생님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회원들이 직접 준비해 온 정성이 더욱 빛났다. 작가님이 직접 마련한 샌드위치는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한 입 베어 물면 고소한 빵 속에 담긴 마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어느 회원은 베지밀을 쥐여 주고, 누군가는 꽃다발로 향기를 나누었고, 또 누군가는 코사지를 나누어 주었다. 작은 손길들이 모여 커다란 환대가 되었고, 그 마음이 자리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순간 모두의 품에 꽃이 피어난 듯했다.
나는 그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꺼냈다. 서툰 사진 속에도 웃음과 눈빛은 그대로 담겼다. 기록이라기보다 마음의 인사였다.

그 여운을 안고 돌아오는 길, 나는 차 대신 걸음을 택했다. 발걸음이 스스로 길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지나 뒷길로 접어드니 남편이 가족 톡방에 올려둔 사진 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전거를 타며 찍어 올린 꽃밭이었다. 저 멀리 기린의 목처럼 길게 솟은 아파트 단지가 가물가물 보였다. 꽃길을 따라 걷는 동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만큼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길은 뜻밖에 막혀 있었다. 강둑길이 눈앞에 보였지만 그 사이에 깊은 숲 구덩이가 가로막고 있었다.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 둑길만 오르면 익숙한 길이 이어질 텐데….’ 그러나 삶이 늘 그렇듯 가장 가까워 보이는 길이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나는 방향을 틀어 반대편 꽃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우륵문화제 행사장이 있는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멀리서 희미하던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다. 북소리와 가락이 바람결에 밀려와 귀를 간질였고, 발걸음은 절로 가벼워졌다. 돌아가는 길마저 축제의 일부처럼 흥겨웠다. 그렇게 흥겨운 가락에 이끌리며 꽃길을 걸어가자 마침내 강둑길에 오를 수 있었다.

둑길에 올랐을 때, 눈앞의 강물이 오랜 벗처럼 반가웠다. 자주 걷던 길이었지만 오늘은 새롭게 다가왔다. 칡덩굴은 푸른 손을 흔들었고, 새순은 “살아 있다”고 속삭였다. 초록의 생명력이 이토록 강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걷는 동안 깨달았다. 길은 언제나 꽃길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막히기도 하고, 돌아가야만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도 있다. 삶 또한 그렇다. 예상치 못한 막힘 앞에서 낙담하기보다는 돌아가며 얻은 풍경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낯선 길을 거쳐 다시 정겨운 길에 이르는 것, 그것이 삶의 모습일 것이다.

아리수는 축제를 알지 못한 채 묵묵히 흘렀다. 환호와는 달리 강물은 담담했지만, 그 흐름 속에도 저 멀리서 들려온 북소리와 가락은 오래도록 남았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가락을 듣는다. 어느 길을 걷든 결국 흘러가는 물처럼 자신만의 길을 찾아간다. 오늘 내가 걸은 길은 내 삶의 지도 한 장이 되었고, 그 위에 남은 가락은 앞으로의 발걸음을 또다시 이끌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