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향계/ 2025, 대한민국 시 낭송 축제를 보며

강찬모 문학박사·포석조명희문학관

2025-11-13     동양일보
▲ 강찬모 문학박사·포석조명희문학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은 천지(天地)의 시작을 알리는 조물주(造物主)의 ‘음성’이며 ‘영성(靈聲)’이었다. 창조된 만물은 조물주의 말씀으로 비로소 존재와 의미가 되었고 ‘생명’을 얻었다. 이렇듯 태초의 창조된 만물에 합당한 이름을 지어 ‘호명(呼名)’할 때 ‘시(詩)’도 함께 탄생했다. ‘부름’을 통해 ‘의미’가 된 ‘꽃’(김춘수, 「꽃」)처럼 조물주의 태초의 말씀과 시의 탄생은 동일한 ‘뿌리’다. 말 즉 언어가 시의 ‘집’이요 ‘재료’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의 고향은 태초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기원이며 인류의 기원이 시의 ‘시원(詩源)’인 것이다. 태초의 말씀이 곧 시였다는 사실이 얼마나 경이롭고 가슴 벅찬 두려움인가.
따라서 하나하나에 명명된 태초의 말씀은 모두 지극히 아름다웠다. 지용의 말처럼 “최초의 발성(發聲)”인 시였기 때문이다. 오염되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말 진실한 말은 시가 꿈꾸는 오래된 미래가 아닌가. 현대 문명의 어두운 징후에서도 우리가 시의 마음과 언어의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동양의 유구한 인문적 전통에서도 시는 ‘사서(四書) 삼경(三經)’ 중 하나인 ‘시경(詩經)’으로 존숭(尊崇)되었다. 종경정신(宗經精神)이 찬연한 상고주의(尙古主義)에서 경전(經典)의 반열에 우뚝했던 것이다. 공자는 시경에 수록된 3백여 편의 시를 “시삼백일언이폐지왈사무사(詩三百一言以幣之曰思無邪)”라고 했다. 일언이폐지(一言以幣之),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로서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진실하고 정직하며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선한 믿음과 깊은 신뢰에 기초한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시는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소망했다. 아름다움은 꾸미고 가꾸는 인공과 분식(粉飾)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진실한 마음이 시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선조들은 ‘위미(爲美)’를 ‘악(惡)’으로 보았다.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꾸미어 진정한 아름다움을 호도한 탓이다. 이러한 연유로 사물과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본질이며 그 자체를 최상의 미(美)로 인식했던 것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다운 시를 좋은 시라고 여기는 것은 그래서 지금도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변치 않는 진리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언어를 빌려 음악과 조화되어 소리를 얻을 때 언어는 새로운 ‘날개’를 단다. 시가 음악과 더불어 일상에서 향유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시가(詩歌)’와 ‘가사(歌辭)’라는 문학 형식에서 보듯 고래(古來)로 시와 ‘노래’ , 시와 ‘율(律)’은 쌍생아였다. 시는 본래 ‘흥취(興趣)’ 있는 노래였다. 시 속에 소리의 질서가 숨을 쉬기에 일정한 ‘리듬’을 생성한다. 이러한 시를 소리로 가창(歌唱)하여 자연과 소통하며 합일을 이루는 것이 ‘시 낭송’인 것이다. 소리를 잉태한 시가 낭송에 이르러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낭송에 이르러 이윽고 온전한 ‘종합’을 이루어 승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 낭송은 그동안 읽어버리고 있던 시의 기억과 고향을 상기하며 화창(和唱)하는 미(美)의 ‘향연(饗宴)’인 것이다. 옛 속담에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한식경의 망중한(忙中閑)에서도 한 편의 시 낭송은 삶의 향기를 불러오는 마법 같은 휴식을 선사한다. 각양각색의 꾀꼬리들이 정답게 시새워 노래하는 ‘계림(桂林)’의 숲은 또 얼마나 울울창창(鬱鬱蒼蒼)할 것인가.
지난달 10월 31일 오후 2시 청주 문화제조창에서 열린 ‘2025 대한민국 시 낭송 축제’는 이를 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구현한 아름다운 시 낭송의 꿈결이었다. 단순한 시 낭송에 그치지 않고 출연자들이 선보인 낭송과 연기가 조화를 이룬 퍼포먼스는 무대 위에서 펼치는 미의 종합예술로 큰 감동을 자아냈다. 여기에 목소리의 마술사로 대중에게 알려진 성우 고은정 씨의 녹슬지 않은 청량한 음성과 배우 박정자 씨의 가을을 닮은 콘트라베이스 같은 중후한 음성은 시 낭송 축제의 격을 한층 높였다.
이번 축제가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시 낭송의 날 선언문’이 선포되어 매년 10월 31일을 시 낭송의 날로 지정 채택했기 때문이다. 물질적 풍요가 삶을 옥죄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시작한 축제가 드디어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날 축제가 시 낭송의 무성한 숲을 위하여 ‘계수나무’ 한 그루를 심는 첫 번째 ‘식재(植栽)’의 자리가 된 것이다. 게다가 11월 1일 ’시의 날‘의 전야를 화려하게 수놓는 푸른 서정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부디! 시를 읊고 노래하는 낭송의 메아리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사는 사람 동네에 강물처럼 흐르고 푸른 이끼처럼 번지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대립과 갈등, 경쟁과 파괴가 첨예한 현실을 위무하고 일용할 양식을 찾아 수고한 모든 이의 고단한 하루를 토닥이며 평화가 깃드는 안식의 시간이 되길 기원한다. 끝으로 대한민국 시 낭송 축제를 기획하고 척박한 땅 위에 비단을 깐 조철호(동양일보 회장) 한국시낭송전문가협회 회장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