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그 선(線)을 넘지 마라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2025-11-13     동양일보
▲ 박노호 한국외대 명예교수

우리는 누구나 가족 구성원으로, 사회 구성원으로, 한 나라의 국민으로, 그리고 세계인으로 가꾸고 지켜야 할 일정한 도리와 규범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울타리는 공동체를 지켜주는 보호막임과 동시에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때로는 경계선에 너무 가까워지기도 하고 또는 경계선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흠칫 놀라며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경계선을 넘나들거나 경계선의 모양 자체를 바꾸려는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평범한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선(線)에 비하면 한 조직을 이끌어갈 책임을 위임받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뚜렷하고 촘촘하게 그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다중의 안위와 행복이 그들의 의사결정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철저한 자기관리와 조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특히 선거를 통해 국가 운영의 책임을 떠안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와 정책이 그들에게 그어진 선을 넘어서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경계해야 한다. 선진 민주정치에서는 이러한 정치 절차가 일상이 되어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 우리 나라 곳곳에서 울타리가 무너지고 경계선이 희미해지며 심지어는 울타리와 경계선이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일이 거듭되고 있다. 1945년 해방정국에서의 일이 아니라 2025년 세계 10대 경제 대국 대한민국에서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일상이다.
우리는 지난 윤석열 정권이 무너지고 처벌받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당연히 지켰어야 할 선을 뛰어넘어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경계선을 지워버린 것이 비상계엄이었다.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고 무시해도 된다고 오만하게 판단하고 저지른 일이었으며, 선을 넘은 그 행위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처절한지 전직 대통령 스스로도 또 국민 모두도 소름 끼칠 정도로 실감하고 있다. 그럴 줄 모르고 뽑았던 대통령이 저지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던 비상계엄 선포의 계산서는 고스란히 국민이 치르고 있다.
이재명정부는 시작부터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출발했다. 직전 정부의 어이없는 패착에 허겁지겁 어부지리로 꿰찬 정권이었음은 물론 얽히고설킨 사법리스크를 안고 당선되었기에 그 앞날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법원은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두고 2심에서 무죄 선고된 이재명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의 대통령 당선 후 이 사건을 포함한 5개의 형사 재판 모두 재판부가 ‘추후 지정’을 밝히면서 이대통령을 둘러싼 5개 재판 모두가 중단된 상태다.
여기서 그쳤어야 한다. 여기까지도 아슬아슬하게 진행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권 민주당은 국회에서의 절대다수를 맹신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추후 지정’이란 것이 임기 내 언제든 재판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사후를 장담할 수 없으니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법리스크를 확실히 틀어막겠다는 심사였으리라. 국회에서 과반도 한참 과반인 단독 166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무엇을 못 할까 보냐는 심산인 것이다. 거기서부터 거대 여당 민주당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검찰을 해체하고 사법부를 압박하며, 이대통령의 임기중 사법리스크 차단을 목적으로 ‘재판중지법’ 입법을 추진하는가 하면, 이대통령이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에 기소된 ‘형법상 배임죄’ 폐지를 추진해 임기 후의 사법리스크마저 지우려 하고 있다.
집권세력의 ‘선 넘기 폭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는 대장동 사건의 1심판결에 대해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는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으며, 그 배후로 대통령실과 법무부장관이 지목되고 있다. 검찰은 반발하고 여론은 들끓고 있다. 지금은 내년 예산안을 처리해야 할 중요하고 바쁜 시간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중차대한 시점에 대한국민이 이런 어이없는 난리를 겪어야 하는가?
국민이 보고 있다. 국민은 알고 있다. 국민이 만들어 놓은 그 선(線)을 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