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직업으로 다시 만나는 충북 여성의 삶'
충북여성재단, '2025 충북여성생애구술사 이야기마당' 구술사, 가족, 시민 등 200여명 함께 충북여성사 09 <잊혀진 노동, 살아있는 목소리 –사라져가는 직업에 종사한 충북의 여성들> 발간 기념
"1970~1980년대는 여성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눈길을 받던 때였기에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눈치가 보여서", "일을 하고 있으니 애들 소풍이나 입학, 졸업식에 참여를 못한 게 가장 미안하고 안타까웠어요", "무슨 큰일한다고 애들한테 전화도 안하냐는 남편 핀잔이 서운했다", "남자 직원보다 훨씬 일도 많이 하고 열심히 했는데 여자라고 승진을 안시켜 주대요", "제때 끼니를 못챙겨 헤진 고무신 꿰어 신고 길가 딸기 따먹으며 죽어라 일만 했지요. 이제는 어엿한 2만 누에고치의 사장이랍니다."
1955년 이전 출생자로 지금은 사라지거나 잊혀진 직업에 종사했던 충북의 여성들이 가족 생계의 중심이자 지역사회 노동 주체로서 겪은 성차별, 직업적 편견, 노동의 애환과 자부심을 담은 살아있는 여성사가 발간됐다.
'2025 충북여성생애구술사 이야기마당'이 18일 오후 2시 충북미래여성플라자에서 열렸다. '충북여성사: 잊혀진 노동, 살아있는 목소리 –사라져가는 직업에 종사한 충북의 여성들' 보고서 발간을 기념해 열린 자리에는 구술에 참여한 여성들과 자녀, 시민 등 200여명이 함께해 역사 속 여성의 사회진출과 직업의 흔적을 조명했다.
보고서에는 △누에치기 66년, 직업이 '벌거지 사장'이라는 현역 양잠농부 이은근(94·보은)씨 △가방 메고 천리길, 화장품 방문판매원 정숙희(86·진천)씨 △국민 114 안내요원 전화교환원 출신 이춘대(85·충주)씨 △전화가 없던 시절 주민 비밀을 다 간직해준 목도우체국 전화교환원 박정순(79·청주)씨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기와 산모의 생명을 받아낸 조산사 홍성명(71·증평)씨 △청주 연초제조창 타이피스트 김문자(82·보은 출생·서울 거주)씨 △빻고 짜며 지켜온 50년 방앗간 인생 김유숙(73·음성)씨 △'제천 맵시는 내가 이끈다' 의상실 주인 허숙(74·제천)씨 △전통을 잇고 짓는 삯바느질쟁이 한복집 주인 이옥자(72·청주)씨 등 9명의 구술 인터뷰가 300여 페이지에 담겼다.
특히 그간 청주에 집중됐던 여성사 기록이 지리적 한계를 넘어 도내 8개 시·군으로 조사 범위를 확장해 지역적 다양성을 확보했다.
충북여성재단이 추진한 이번 프로젝트는 유영선·김미선·남정현·맹수미·박미란·조아라·이은정·이성환 등 각계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진행됐다. 기획과 섭외, 채록, 집필, 감수까지 1년 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삽화 속 타자기, 전화기, 누에상자, 바느질과 방앗간 기계는 더 이상 일터에서 보기 어렵지만 그 도구들을 지녔던 여성들의 삶은 이번 이야기마당을 통해 역사 속 ‘본문’으로 복원됐다.
이로써 이번 보고서는 근로자의 노동사이자 산업과 기술의 발전사이며, 성별화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저항하고 주체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여성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현주 충북여성재단 정책연구팀장은 “이번 구술작업은 단순한 정보수집이나 직업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망각해온 역사의 단단한 기반을 다시 만나는 경험이자 삶을 함께 되짚는 치유의 시간이었다”며 "이번 작업을 진행하며 여성의 노동은 시대를 견디는 힘이었음을 인식했고 잊혀진 노동은 끝났지만 살아있는 목소리는 영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정미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는 “재단이 4년만에 재개한 생애구술사이자 아홉번째 충북여성사가 되는 이 기록은 그들이 만든 사회적 기여와 의미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지역 여성의 노동과 기억, 삶의 존엄을 복원하는 중요한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