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불완전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

권이화 시인

2025-11-18     동양일보
▲권이화 시인

몸이 말하는 소리와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다. 침묵하다가도 가슴으로 어깨로 신호를 보내는 몸. 마음을 움직이고 온기를 불어넣는다. 원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이 있다며 저 깊숙한 곳에 머무는 감각을 불러낸다. 이것은 사소함이 아니라 생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불완전한 몸이 나를 이끄는 그 틈에서 욕망이 피어난다.

송복남의 장편소설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을 읽었다. 구한말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따라가며, 책을 덮고도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소설은 역사와 종교와 지성과 경제, 그리고 욕망을 엮어 하나의 세계를 재창조했으나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다. ‘그랑호텔’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가상공간이며 욕망의 모델이다. 이 호텔의 위치는 친일파 윤덕영의 덕수산장이 있던 자리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식 저택이었으나 지금은 소실되었고 입구에 서 있던 석조대만 남아 있다.

구한말은 정신과 육체가 시련을 겪던 시기였다. 서사는 그 시대의 어둠에서 출발하여 현대의 불안으로 이어지며, 한 줄기 불빛처럼 욕망의 그림자를 추적한다. 소설 속 인물은 근현대 실세들이다. 청계천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무당의 굿을 보고 영혼의 불멸과 내세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 대부호는 당시 최고의 지배층인 엘리트 출신이다. 또한, 애버리지니 필름으로 한층 고조된 투숙객들은 결코 부에서 퇴실하지 않을 실세의 집합체를 반영한다. 그들은 자본과 권력이 만든 상부구조 위에 있으며, 주기적으로 열리는 이벤트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재확인한다. 가진 만큼 사건의 중심부에서 다양한 변주를 발생시키는 주역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영혼마저 교환 대상으로 삼는다. 호텔의 로비는 눈부시게 밝지만, 그 빛은 인간의 본질을 비추지 못한다. 이성의 순수한 자기규정보다 생존을 보증하는 부와 권력의 질서가 우선한다. 그들은 소유와 사회적 위계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 증명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거울을 마주하고도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다. 물질화된 영혼은 반사된 자신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물질의 욕망을 단순한 타락으로 그리지 않는다. 거대한 자본의 파고 속에서 그것은 결핍된 사랑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넘어서 반복하는 욕망의 변주는 결국 사랑을 향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IMF를 겪으며 우리 사회는 정점을 맞았다. 한강의 기적으로 자본의 기적을 이루었으나 균열이 생기고 세계자본에 재편성되면서 새로운 욕망의 거울을 들게 된다. 그 거울 속에서 월스트리트의 붕괴와 자본의 무덤, 그리고 소유를 지키려는 유령 같은 영혼들을 형벌처럼 마주한다. 이 모든 과정을 파헤치는 주인공을 통해 그랑호텔을 둘러싼 욕망의 생애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깡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욕망을 욕망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기능을 넘어 존재를 이어가는 내밀한 의지이며 고유한 자유다. 근대 이후 욕망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려는 긍정의 힘으로 읽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를 “존재가 스스로를 존속시키려는 노력”으로 설명했다. 불완전한 우리는 그 의지를 통해 살아남는다. 결핍의 표상으로써 욕망은 무수한 현상들의 이면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리듬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랑호텔의 투숙객들>은 욕망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통해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욕망하고, 욕망하기에 여전히 살아 있다. 불완전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욕망이 일으키는 이 떨림, 사랑의 기원을 회복하려는 아름다운 불빛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