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정치철학의 모순

정명희 화가

2025-11-19     동양일보
▲ 정명희 화가

요즘 4050은 니체(1844~1900)에 빠졌다는 말들을 자주 듣는다. 그건 아마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한 그의 주장에서 온 말일 것이다. 그는 생철학과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린다. “신은 죽었다”라며 유럽의 기존 가치체계붕괴를 꼬집어 표현 건, 기독교 국가체제의 붕괴로 볼 때 ‘흥미를 끈(Interest)’ 말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불안한 작금의 현실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나 자신의 때는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날이 필요할 것이다’란 니체의 주장이 먹혀, 그의 사상에서 현실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것이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암담하고 서글프다.

젊은 날 니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쇼펜하우어(1788~1860)였다. 그는 “만일 그대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면 우선 주위로부터 자신이 가치 있음을 인정하게 해야만 한다.”란 말은,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선 뭐든 괜찮다 로 이해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알기로 그는 플라톤(BC427~347)과 칸트(1722~1804)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한때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혀 살기도 했던 사람이다. 또한 사랑과 비판정신을 앞세웠던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플라톤은 법률가에 가까운 철학자의 여정을 걸었다. 때문에 최근까지 찬사와 비판이 따르며 소크라테스(BC469~399)와 함께 정치철학의 근간을 잇는다. 그렇기에 법적 정당성의 근거를 인간적 선호에서 찾고자했던 것과 거리를 두었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초래하는 사회적 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으로 법이 갖는 보편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칸트 또한 법과 도덕의 관계로 정치철학에 다가선다. 그의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실정법을 통해 각자의 자유가 다른 것들과 공존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인간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도록 정의 한 것이 그것이다.

내 의지대로 살기 위해 니체를 붙잡은 걸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법을 핑계 삼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바뿐 실정법 운영자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법을 고쳤고, 나아가 헌법까지 바꾸려 든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박탈감을 해소하려는 젊은 세대의 비애를 이해하며, 오죽하면 니체에 대한 서적을 찾아 탐독할까 싶어 더 슬프다. 그에 관한 서적만도 국내에 출판된 것이 640여종에 이르고, 최근 출판된 책도 무려 39권에 달하는 까닭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니체철학회(회장 양종대 건대교수)는 이런 현상을 놓고 젊은이들이 박탈감에서 오는 사회적 혼란이라 짚었다. 퇴근 후 하루의 피로를 푸는 술자리에서 나누는 걱정은 대개가 ‘나라걱정’에서 ‘나의 걱정’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찾아야한다는 지성인의 당연한 가르침을 따르려는 이유일 것이다.

내 자신 신문이나 방송을 대하기 겁나는 현실을 놓고 볼 때,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란 말은 오늘의 세계가 과거 유럽처럼 어느 곳 하나 제정신 박힌 곳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지난달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OECD 행사의 경험을 통해 얻은 건 힘이 있어야 대접받는 세상이란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가요가 그렇듯 법을 제정하는 입법기관과 그걸 움직일 힘을 가진 권력자 근처라도 가야 사람대접 받는다는 사실이다. 니체 시절에도 이미 절감하고 있었기에 그 같은 말을 한 것일 게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억울하면 출세해야 산다.

공정하다고 느끼기 힘든 삶의 현장을 타개할 방법이 모호한 오늘을 사는 국민의 심정은 똑 같기 마련이다. 그만큼 한국 정치가 국민으로부터 신의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이야 법의 정신을 앞세웠겠지만 어지러운 정치현실은 법의 정의를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