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국모’ 육영수 여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오는 29일 옥천 관성회관서 숭모제 열려

2025-11-25     박현진 기자
▲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우아하고 인자한 이미지로 ‘국모’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그 이름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기억에 ‘국민 어머니’로 각인된 그는 다름 아닌 고 육영수 여사다.

어렴풋하나마 41년 전, 육 여사 서거 당시 흑백TV 화면 속에서 수천 송이 국화꽃과 대형 초상화가 세워진 운구차량을 따라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뒤를 따르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음 10월 14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덕유산 기슭에서 육종관씨와 이경령 여사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종관씨는 성실한 독농가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진 보수적인 토호였다고 한다. 근대문명에 대한 깊은 동경과 미신을 배격하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특히 기계류에 대해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육 여사를 낳을 때 ‘집마당으로 기어든 거북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는 어머니 이경령 여사도 후덕한 마음씨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며 큰 살림을 해내는데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마음 착한 교동집 작은 아씨’로 이름이 나 있었던 육 여사는 오빠 육인수와 언니 육인순(72년 작고) 여사, 동생 육예수 여사와도 남다른 우애를 드러냈다.

죽향국민학교를 거쳐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옥천여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도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며 늘 단정한 외모에 조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육 여사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당시 육본 정보국 1과장으로 복무하던 소령 박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1950년 12월 12일,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군인 사위를 꺼렸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 대통령은 34세, 육 여사는 26세였다.

1963년 10월 박정희 준장은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육 여사는 38세에 3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됐다. 이후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정수 직업훈련원, 소록도 국립나병원에 양지회관 등을 건립하며 자상하고 꼼꼼한 아내로서의 외조는 물론 365일 새벽 6시부터 밤 1시까지 국모로서 대통령의 조력자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의해 서거, 11년간의 청와대 생활을 마감하고 49세의 젊은 나이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했다.

오는 29일 육영수 여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옥천 관성회관 대강당에서 숭모제가 열린다.

옥천문화원과 민족중흥회옥천지역회가 주최ㆍ주관하고 옥천육씨 대종회와 (재)육영아카데미가 후원하는 추모제는 ‘시대를 넘어 국민과 함께한 여사’라는 타이틀 아래 추모식과 제례가 진행된다.

추모제는 의식행사와 함께 육영수여사 100년사 영상 등이 상영된다. 숭모제례는 추복성 옥천군의회 의장, 김대훈 옥천문화원장, 옥천육씨 종친회 관계자 등이 제관으로 나서고 참가자들의 분향과 헌화로 마무리된다. 박현진 문화전문기자 artcb@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