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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작고예술인을기억하며…사람은가고,예술혼은남고

화가 안승각의 생애와 예술 -2 (1908.12.26.~1995)

청주작고예술인을기억하며/ 나의 인생, 나의 그림

2023. 10. 05 by 유영선 주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 ]청주상고 미술교사로 부임

1943년초 안승각은 모교인 동경 태평양미술학교엘 들렀다가 직원으로부터 “고국에 갈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청주상업고등학교의 메구로 교장으로부터 한국인 미술교사를 추천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는데 생각해보라고 했다. 서류를 보니 비교적 좋은 조건이었다. 청주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집으로 와서 지도를 펴놓고 찾아보니 강물도 흐르고 그림을 그리며 살기에 알맞은 고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이력서를 보냈더니 메구로 교장으로부터 빨리 부임해 달라는 전보가 거의 매일 날아들었다.

그해 5월, 안승각은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초등학교 2학년인 영일과 생후 3개월 된 원자를 데리고 아내와 귀국길에 오른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조치원역에 내리니 메구로 교장과 교무주임 배석장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2의 고향인 청주에 첫발을 딛고 5월5일 첫출근을 했다.

“학교에 출근했더니 학생들은 삭발을 하고 군복을 입고 각반과 전투모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는 일본에서 생활했던 식으로 장발에다 타이를 매고 학교엔 나갔더니 교장은 매일 머리 깎고 제복을 입으라고 강요를 했다. 그러나 나는 출근을 안 하면 안했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티고 그대로 근무를 했다. 3개월을 버티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삼호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

나의 인생, 나의 그림(37) 1978. 충청일보

그는 청주상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청주사범학교에서도 미술반을 지도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청주사범의 이시하다 미술교사가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는 청주사범학교로 이직을 하게 된다. 그는 미술반을 맡아 열심히 지도했다. 2학기가 지나고 미술반 15명이 서울대 미대에 응시했는데 무려 11명이 합격을 했다. 지방학교에서 그것도 예능분야에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합격을 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전국의 미술계와 교육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미술교사가 누구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1948년 그는 1회 개인전을 청주 샛별다방(후 신도다방)에서 열었다. 그러나 다방에 걸린 작품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다. 그는 지방에서 순수예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했다.

제1회 충북미술대전 오픈식.
제1회 충북미술대전 오픈식.

충북미협 결성, 초대 회장 맡아

5.16후 1962년 문교부의 학제 개편에 따라 전국의 사범학교들이 통폐합되면서 교육대학으로 바뀌었다. 안승각은 논문제출 등의 절차를 거쳐서 청주교육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 대학이 늘어나면서 전국적으로 미술과와 미술교육과들이 늘어났다. 안승각은 교대교수로 근무하면서 충북대 미술교육과와 청주여사대 미술교육과(현 서원대)에도 출강을 했다. 그는 대학에서 미술인들을 길러내면서 미술인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동경 유학을 한 청주상고 교사 김종현과 충북미술협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안승각, 부회장은 임상묵(충북대 교수), 총무는 왕철수(교사)가 맡았다. 미협의 첫 사업으로 학생들에게 미술활동에 관심을 갖게 할 겸 미협기금도 만들 겸 사생실기대회를 열었다.

미술인들이 주최하는 순수 사생대회의 뜻을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 안승각은 구훈단(驅訓團) 지프를 빌어 직접 학교를 방문해 교장에게 협조를 구했다. 홍보가 효과가 있었음인지 너무 많은 참가자들이 신청을 해 당초 중앙공원에서 열려던 사생대회를 각 학교별로 학교주변에서 실시했다. 성공리에 대회를 마쳤으나, 대회 후 청주문화원 사무실에서 은행직원까지 동원돼 밤늦게까지 동전을 세느라 촌극이 벌어졌다. 학생들의 대회 참가비가 대부분 동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으로 미협의 기금이 마련돼 회원들의 전시와 작품활동을 도울 수 있었다.

안승각은 충북미협 회장을 10년 동안 맡은 데 이어 1976년 8월에는 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예총) 충북지부장을 맡게 된다. 오세탁 지부장의 사의로 공석이 된 자리로 2년 동안 잔여임기를 맡았다. 예총을 맡고보니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판 돈과 김은수(한국도자기 부회장)씨의 후원금으로 겨우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1회 충청북도미술대전(충북도전)을 만든다. 충북도전은 공모전으로 갈증을 느끼던 미술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도전(道展) 덕에 처음으로 예술진흥원(현 문화예술위)과 충북도로부터 지원금도 받았다. 2년 동안 예총지부장을 맡는 동안 힘도 들었지만 보람도 있었고, 특히 어려운 가운데 치른 충북예술제와 전국민속경연대회 참가도 잊지 못한다.

테이블 위의 과일.
테이블 위의 과일.

12번 개인전...장남도 세계적인 작가

안승각은 1948년 샛별다방에서 1회 개인전을 연 이후 모두 12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청주시에 전시를 할 만한 마땅한 공간이 없다보니 여기저기 작품을 걸 만한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전시회를 열었다.

충북도 산업장려관과 청주 국제백화점, 청주문화원 전시실 등에서 주로 전시를 했다. 1회 작품전 때는 주로 구상작품을 전시했으나, 3회부터 몇년 동안은 비구상 작품에 매달리다가 다시 구상작품으로 돌아갔다. 안승각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피난민’(1942년 작, 72x9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구상풍의 그림이다. 17회 선전에서 입선한 ‘청음’에서 보이는 것처럼 약간 굵고 거친 터치가 인상적이다. 아들 안영일은 아버지가 나이프를 잘 썼다고 회상했다. 안승각은 11회나 개인전을 했음에도 안타깝게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이 점이 그를 미술사적으로 조명하는데 아쉬운 부분이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교육자로 활동한 탓에 자신의 작품보다 제자들의 교육과 미술인들의 작업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풍경
풍경

안승각은 평소, “청주는 타도에 비해 교육문화도시로서의 분위기가 마련돼 있지 않다. 전주나 광주 등지를 보면 다방이나 음식점 등 어느 곳을 가더라도 많은 서화가 걸려있는 것과 비교해볼 때 청주를 비롯한 충북지역은 예술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한 이유가 “반드시 소득수준이나 현실적인 생활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물질문명에 휩싸여 정신문화에 대한 소홀함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더구나 시민들이 전시작품을 관람조차 하지 않는 풍토에서 작가가 작품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자신이 일본에 살 때 기업체나 사업가에게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던 것을 생각하면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국에서는 전업작가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고 했다.

황혼의 법주사.
황혼의 법주사.

안승각은 부자(父子) 화가이다.

장남 안영일(1934-2020)이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지만, 자신처럼 미술을 하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게 여겼다. 화가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일은 청주사범학교에 입학해 미술반에서 활동하면서 간간이 문교부 주최 전국중고교학생 작품 공모전에서 상을 타더니 아버지 몰래 혼자서 아버지 물감으로 유화를 그리곤 했다. 고3때 국전입선, 서울대 미대를 거쳐 1966년 미국으로 가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78년 교육대학 교수직을 은퇴한 후 안승각은 35년동안 살아온 청주를 떠나 서울로 이주한다. 서울에서도 화실을 운영하며 후배들을 기르다가 1979년 6월 한국예총 화랑에서 12회 개인전을 성대하게 연후, 자녀들의 초청으로 1979년 10월 미국으로 이주, 장남 안영일 작가와 살았다. 성실함과 타고난 감수성으로 작품활동은 물론 제2의 고향인 청주에서 미술교육의 주춧돌을 놓고 미술인들의 작품 제작 환경을 고양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안승각은 1995년 항년 88세로 미국 LA에서 청주를 그리워하며 눈을 감았다.


▲안승각 연보
1908. 12.26 황해도 연백면 출생
1934. 황해도 해주공립사법학교 졸업
남천공립보통학교 교사 재직 중 일본유학
일본 동경 태평양미술학교 입학
1935. 이남덕과 일본에서 결혼
동경태평양미술협회전 입상
동경 제1미술협회전 입선
1937. 일본 동경태평양미술학교 졸업
일본 동경태평양미술학교 졸업 콩루르입상
1938. 제 17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939. 제 18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940. 제 1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942.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1943.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사 부임
1945. 청주사범학교 교사로 이직
1948. 1회 개인전(청주 샛별 다방)
1957. 충북문학예술협회 창립(문총), 최고위원 역임
1958. 청주시문화상
1960. 녹조소성훈장
1962. 청주교육대학 교수
충북미술협회 초대회장

홍조소성훈장
1963. 충청북도문화상
1967. 국민훈장

1968. 동아국제미전 초대 출품
1975. 원로작가전 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
1976. 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 충북지부장
1979. 12회 개인전(서울 예총화랑)
미국으로 이주
1995. 향년 88세로 미국 LA에서 작고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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