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삼다(三多)’를 실천한 무용가
“전통을 기반으로 한 움직임으로 가장 한국적인 무용극의 창시자.”
“한국근현대무용사 산 역사.” “오랜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한국의 대표 무용극과 많은 무용스타를 배출.” “극장무용의 기틀을 견고하게 한 송범 선생.” “전통을 보존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의 재장조를 통해 한국 창작무용계에 새로운 지평을 펼친 송범.”
2017년 6월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의 포스터에 적힌 내용이다. 한 개인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받은 이는 평생을 무용에 바친 송범(宋范.1926.1.30. ~2007. 6.15)이다. 송범은 2007년 캐나다에서 작고했다. 그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후배들은 추모공연을 마련하며 위와 같은 찬사를 보낸 것이다. 포스터의 찬사가 말해주듯 그는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현대식 한국무용의 분야를 개척한 무용극의 선구자다.
국내파인 송범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춤을 섭렵했다. 17세 때 우연히 최승희의 춤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춤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뒤 1945년 양정중학교 졸업 후 조택원의 문하에 입문하여 ‘워킹발레’ 중심의 이시이바쿠 기본을 배웠고, 최승희의 제자인 장추화무용연구소에서 조교가 되어 모던댄스, 한국무용, 인도춤 등을 배웠다. 이때 배운 모던댄스는 독일의 마리 뷔그만의 기본동작들이었다. 일본유학파 한동인, 정지수에게 정통발레를 배우고, 명무 한영숙에게 ‘살풀이’와 ‘승무’ 등 전통춤을 배운다. 대구에서는 박지홍에게 6개월간 ‘승무’를 배우고, 김선봉에겐 ‘봉산탈춤’을 배웠다.
이렇게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춤을 섭렵한 송범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과 역량으로 범장르적인 춤창작과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안무할 수 있었다. 특히 국립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무용극’이라는 장르를 최초로 한국 공연예술계에 선보이고 완성시켰다. 무용의 모든 장르를 통달한 그였기에 무용적 진가를 알리는 안무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초지일관 ‘삼다(三多)’를 실천한 무용가라고 입을 모은다. 열심히 공부하고(多習), 끊임없이 생각하고(多索), 많은 작품을 만든(多作) 무용가였다.
청주시 영운동에서 출생 본명은 철교
송범은 1926년 1월30일(음력 1925.12.17.호적에는 1926.3.25.로 기재됨) 청주시 영운동에서 아버지 송내현과 어머니 윤복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35세, 어머니는 37세였다. 맨 위로는 홍례, 원례 누나가 있고 그 밑으로 송범과 11살 차이가 나는 형 철면이 있었다. 이 형이 바로 송범을 뒷바라지해 준 화가 송정훈이다. 그 아래로 정례 누나가 있고 막내가 송범이었다. 송범의 이름은 원래 철교(喆敎)였다. 이 이름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쓰고 그가 무용을 한다고 결정하자 형이 이름이 예술가답지 않다고 어느 유명한 작명가에게 지어온 예명이 범(范)이었다. 그는 ‘범’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가 1살 때 36세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아이들이 무서워할 정도 엄한 분이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어머니는 막내인 송범을 키우고 가르친 후 74세(1963년)에 돌아가셨다.
영운동은 지금은 시내가 되었지만, 예전엔 한산한 변두리 시골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형편이 어려워져 서울로 이사를 했는데, 그때 송범은 2살이었다.
송범은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형은 공부를 잘 해서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한 후 중학교(5년제)도 3년에 마쳤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전당포에 취직을 하여 보석과 시계 감정을 배워 월급이 괜찮았다. 형이 월급을 받으면서 집안경제가 안정이 됐다. 전당포 주인은 형을 놓치지 않으려고 오전 중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유시간을 주었다. 형은 돈을 모아 동경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미술학교 1학년말 제국미전(제전)에서 입선을 하는 등 열심히 그림을 그린 형은 미술학교를 마치고 상하이로 가서 광고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사업이 잘 되었는지 형이 매달 100원씩을 보내와 살림은 여유가 있었다.
송범의 바로 위인 정례누나는 문학지망생으로 신춘문예에 출품을 했고 여학생 때는 연극반도 하여서 송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아버지는 안계시지만, 그는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양정중학교는 특대생으로 평균 90점으로 졸업했다. 누나 덕에 중학교 2학년까지는 연극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배우를 꿈꾸었다.
최승희 무용보고 ‘춤의 길’ 들어서
송범이 운명적으로 무용과 만난 것은 1942년 중학교 2학년때였다. 부민관에서 최승희 공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호기심으로 혼자서 표를 사서 구경을 했다. ‘청아애사’라는 제목의 춤이었는데 춤을 잘 추는 것인지 볼 줄은 몰라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몸짓이 마음에 들었다. 송범은 2002년 9월 펴낸 <송범의 춤예술 60년-나의 춤, 나의 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최승희 춤을 본 후부터 집에서 혼자 춤을 만들어 추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겐 레코드 판도 많아서 ‘천국과 지옥’ ‘지평선’ 같이 힘든 음악에 춤을 만들어 추곤 했다. 그런 춤은 그때의 내게 기쁨을 주었다. 춤추는 동안은 스스로 감격스럽고, 슬프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였다.”
양정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공부를 잘 했으므로 담임 선생이 의전(醫專)을 가라고 강권했다. 송범은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내고 수험표까지 받았는데 시험을 치르지않고 상하이에 있는 형에게 입시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형은 “학교가 안됐다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그는 혼자서 춤을 추었다. 그가 춤에 소질을 보이자 형이 친구였던 최승희에게 “내 동생이 춤에 관심 있다”고 했는지 데리고 오라고 했다는데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와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면을 하지는 못했다.
1945년 송범은 형 친구인 화가 배운성의 안내로 조택원무용연구소에 들어간다. 조택원은 일본에서 최승희와 함께 이시이바쿠(石井漠)에게 춤을 배운 사람으로, 송범에게 발레의 기본동작과 이시이 바쿠 메소드가 혼융된 소위 ‘워킹발레’를 가르쳤다. 해방이 된지 1년후인 1946년 8월 좌익 무용가들이 다수였던 조선무용예술협회 창립기념 공연이 국도극장에서 있었는데, 이 공연에서 박용호의 ‘해방’이라는 작품을 보고 매력을 느껴 송범은 그의 문하생으로 이적한다. 그러나 예술의 의미추구보다는 이념(좌익)을 앞세우는 박용호에게 실망하여 3개월 만에 장추화 문하로 옮겼다. 이때 장추화에게 같이 공부한 남성무용가로는 조광, 이월영, 정무연, 이인범, 김진걸 등이 있다. 장추화는 최승희 제자로 최승희로부터 마리 뷔그만의 현대무용기본을 상세히 적은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장추화는 인도무용과 한국춤만 했지 현대무용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송범은 그 노트를 보고 스스로 연구해 터득해 조교로 무용을 가르쳤다.
“앉아서 하는 것, 누워서 하는 것, 넘어지는 법, 몸의 신축 동작, 발동작 같은 것을 40분짜리로 하여 기본은 만들어냈다. 물론 그것이 정확한 뷔그만의 기본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그 당시로서는 현대무용의 기본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은 짐작할 정도의 것이었다. 이 현대무용의 훈련은 그후 나의 무용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7년 11월 중앙소극장에서 중국영화행사와 같이 한 장추화 공연에서 그는 ‘습작(習作)’이라는 4분짜리 현대무용으로 출연했다. 이 작품은 공식적인 그의 첫 무대였다. 그의 무용을 보고 평론가 문철민은 ‘균형 있는 육체와 아크로바틱한 기교에서 미래가 촉망되는 신인’이 등장했다며 송범의 예술가로서의 성공가능성을 예고했다.
1948년 10월에는 국제극장에서 2회 장추화무용발표회가 열렸는데 송범은 ‘천하대장군’이란 작품에서 스승의 상대역으로 독무를 맡아 무대 출연을 하게 된다. 이때 송범은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관절에 염증이 생겼다. 그해엔 또 김미화 무용발표회와 김막인 무용발표회에 임성남과 함께 출연했다. 두 사람은 한동인에게 발레를 배운 사이였다. 송범과 임성남은 후일 우리나라 무용계를 이끄는 핵심 남성무용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는 1949년 ‘출진(出陳)’을 창작하였는데, 원시인들이 용맹스럽게 사냥이나 전쟁터로 나가는 모습을 이월영의 북 반주만으로 만든 힘찬 춤이었다. 뒷날 송범은 ‘출진’을 1천번 이상 춘 춤이라고 회고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