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우향에게 ‘구화법’ 배워 의사전달
우향 박래현은 현명한 여성이었다. 운보가 비록 청각장애인이지만, 사회활동을 하려면 필담을 통한 대화방법을 극복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우향은 직접 말로 하는 ‘구화법(口話法)’을 운보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듬해까지는 간단한 의사전달이 구화로 가능할 정도로 성공하게 된다. 운보는 상대방의 입을 보면서 말하는 의미를 이해했고 자신도 간단한 대화는 직접 말로 했다.
부부는 각기 그림도 열심히 그려서 부부전을 계속했다. 제2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해 ‘고풍속초’ 등 20여 점을 전시했다. 제3회 <운보-우향부부전>은 삼월백화점 화랑에서 그리고 제4회 <운보-우향부부전>은 1950년 6월22일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열었는데, 3일 만에 6.25 전쟁이 시작돼 전 작품을 분실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해에 운보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외할머니마저 77세 생일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동생 김기옥과 김기만은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북으로 떠났다. 운보와 우향은 전시회에 모든 힘을 기울인 터라 경제적 여력이 없이 처가가 있는 군산 외곽의 농촌 구암동으로 내려가 처가의 농장 토방에서 몇달 간을 살았다. 장애자인 이유로 납북은 면했다. 전쟁이 지속되자 부산으로 내려 간 운보는 생활고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다가 이당 김은호·이숙종·모윤숙·김활란 등을 만나게 되며, 이때 그림을 판돈으로 군산 구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물감과 붓 등을 사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전쟁 직후인 1952년 운보는 1년여에 걸쳐 한국사람의 모습으로 ‘예수일대기’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차츰 반추상적이고 입체파적인 해체 작업으로 몰입한다. 이듬해 운보와 우향은 성화 30점과 입체파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5회 <운보-우향부부전>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10여 일간 개최했는데 ‘갓 쓴 예수’라는 별칭과 함께 성화를 보려는 기독교인들로 인해 매일 초만원을 이뤘다. 부부는 결혼 때의 약속대로 부부전을 계속 열어서 우향이 죽기 전해인 1971년까지 18회의 <운보-우향부부전>을 열었다.
결혼때 약속대로 18회까지 부부전 개최
운보는 47세에 백양회 타이완 전시회에 참가한 후 더욱 그림에 전념한다. 성북동 집에 30여 평의 화실을 지은 후 우향은 남쪽에서 운보는 북쪽 코너에서 각각 작업에 전념하였고, 추상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상적 부부이기보다는 동지적 부부와 같은 차원에서 서로의 예술세계를 위해 자극을 교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작업공간을 활용하면서 운보의 독특한 습관과 성격, 우향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 둘은 자주 부딪쳤다. 1964년 5월 우향이 먼저 미국으로 가고, 10월 운보도 국제교육학회 초청으로 도미하여 부부가 미국에서 만나 1년여 동안 유럽·동남아의 신·고대 문명을 돌아본다. 운보는 뉴욕의 미술·박물관을 보고 많은 자극을 받았으며, 특히 인디언 박물관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고 돌아온다. 1965년 운보와 우향 부부는 워싱턴 오벨리스크 화랑 초청으로 제14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뉴욕 동남아시아 박물관 초청으로 제15회 <운보-우향부부전>을 해외에서 개최한다.
1967년 제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단으로 브라질 현지에 참가했다가 중남미 여행을 마치고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뉴욕으로 갔을 때, 우향은 미국 유학의 꿈을 뒤늦게나마 판화 연구로 매달려 보겠다고 결심한다. 우향은 뉴욕에 남아 밥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7년간 판화 연구에 매달리고, 운보 역시 한동안 뉴욕에서 우향과 머물며 작업을 해서 로스앤젤레스 시 초대로 제17회 <운보-우향부부전> 개최한다. 이후 운보는 1969년 귀국을 하고 우향만 미국에 남아서 작업을 했다. 1971년엔 성북동에서 9년 만에 인사동으로 화실을 옮겨 운보와 우향의 호를 딴 <운향화실>이라고 지었다. 이 해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아렌타운 미술관과 뮤렌버그대학 공동 주최로 제18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미국에서 개최한다.
1972년 운보는 노후를 청주에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청주시 북일면 형동리에 땅을 매입한다. 그리고 1974년 큰딸 현의 결혼식 참석 차 뉴욕에 갔다가, 판화로 국제전에서 인정을 받아가던 우향을 설득하여 함께 파리와 동경을 거쳐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우향은 ‘귀국판화전’을 열어 국내의 큰 반응을 얻고, 제6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건강악화로 2년 뒤인 1976년 세상을 뜨고 만다. 우향의 나이 57세였다. 운보는 크게 낙담을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신 청주에 우향을 묻었다.
청각장애인들에 각별한 애정
운보는 우향이 떠난 충격을 이기고자 75년부터 시작한 ‘바보산수’에 매달린다. ‘바보산수’란 풍경을 과장, 왜곡, 변형해 신선한 파격을 준 산수화로 “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바보”라며 그린 작품이다. 운보는 또 ‘청록산수’도 그렸는데 ‘청록산수’는 운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녹색을 이용해 호방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목가적인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다.
세계 30개국 스케치 여행도 다녔다. 우향 없이 혼자 다니는 쓸쓸함을 잊고자 가는 곳마다 풍물들을 스케치하고 청각장애인들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기 시작했다. 남·북미 15개국, 아프리카·유럽 15개국을 여행하면서 국제농아연맹총본부를 방문, 한국농아복지회를 세계농아연맹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이 시기 막내딸 영이 수녀가 되며, 마더 테레사 재단의 수녀원이 있는 마닐라·홍콩·대만 등지로 수련을 떠났다. 영의 수녀 선택은 이후에 운보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1984년 운보는 청주에 완공한 ‘운보의집’으로 이주해 이곳서 작업을 하면서 매주 내수성당의 미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사회복지법인 ‘한국 청각장애자복지회’를 만들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지상 4층, 지하 1층으로 ‘청음회관’을 건립했다. 88서울올림픽이 시작되자 기념판화 ‘까치와호랑이’를 제작했다. 그의 그림엔 거침이 없었다. 점선시리즈, 장생시리즈, 문자도를 거쳐 심상시리즈 그리고 완전추상 걸레수묵으로 발전했다. 판화에도 공을 들여 ‘세계 유명작가 50인 판화집’ 수록 작가가 되었고, 운보공방에서 도자기도 빚었다. 1993년 운보 팔순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전작도록 발간 및 전시추진위원회’와 예술의 전당 공동 주최로 열린 전시회는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날더러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면 도인이 되어 선(禪)의 삼매경에서 그림을 드리는 것입니다.” (운보 김기창 어록 중)
운보는 80세를 끝으로 더이상 붓을 잡지 못했다. 대신 전국 장애인 행사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을 했다.
꿈에 그리던 이산가족 동생 만나
청각과 언어장애를 이겨낸 한국미술의 거목, 운보 김기창. 그의 가슴엔 평생 말 못하는 그리움이 있었다. 6.25때 사상 때문에 북으로 간 누이동생 김기옥과 막내 남동생 김기만의 안부가 늘 궁금했다. 2000년 12월 1일 운보는 꿈에 그리던 동생을 만났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동생 김기만이 서울로 찾아온 것이다. 운보는 심장병과 패혈증 증세로 삼성병원에 입원중이었다. 김기만은 맏형 운보의 보살핌과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경기공립고등중학교(경기고 전신)를 졸업하고 전쟁기간중 북으로 가 평양미술대 교수를 지낸 그는 ‘조선화 4대 작가’로 꼽힌다. 여동생 김기옥은 의사였다고 한다.
50년 동안 가슴에 쌓여있던 애달픈 형제의 정을 나누고 운보 김기창은 이듬해인 2001년 1월23일 ‘운보의집’에서 운명했다. 김기만도 형제 해후 뒤 3년 만에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미국에 거주하는 화가를 통해 운보의 가족들에게 전해져 왔다.
방송국 시청자 미술 부문 인식도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국인 화가’로 선정된 운보. 다양한 장르의 시도에서 모두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는 운보 김기창은 약 15,000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청주의 화가로 잠들어 있다.
<김기창 연보>
1914.2.18. 서울 운니동에서 김승환과 한윤명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1920. 승동보통학교 입학,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고 언어장애를 얻음.
1923. 개성 정화여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어머니를 따라 개성으로 이주.
1925. 서울로 와서 승동보통학교 복학.
1930. 이당 김은호 화숙 이묵헌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
1931~1936.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6년 연속 입선
1936. 후견인인 어머니 한윤명 사망
1937~1940. 선전에서 4년 연속 특성
1941~1943. 선전에서 3년 연석 추천작가
1945. 광복 후 화명 운포(雲圃)를 운보(雲甫)로 바꿈
1946. 우향 박래현과 결혼. 이후 총 18회에 걸쳐 부부전시회를 열었다.
1947.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으로 취임
1950. 제4회 <운보-우향부부전>을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열었으나 6.25로 전 작품을 분실.
1952. 군산 구암동에서 작업한 ‘예수의 일대기’를 부산 YMCA 후원으로 전시.
1954. 서울 성북구 성북동 55-1로 이사
1954. 첫 신문소설 삽화로 한국일보 연재소설 정비석 작 ‘민주어족’의 삽화 연재.
1955. 홍익대학교 시간강사
1957. 딸 영의 태몽으로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그림. 이 작품은 바티칸에 소장.
1962. 수도여사대(세종대 전신) 회화과 학과장, 성북동에 부부 화실마련.
1963.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추상화 3점 출품.
1964. 우향과 1년여동안 유럽·동남아의 신, 고대 문명을 돌아봄
1967. 제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단으로 참가.
우향, 판화유학 시작.
1968. 운보도 미국에서 판화 연구
1970. ‘청록산수’ 선보임
1971. 인사동으로 ‘운향화실’ 옮김
1971. 제12회 <삼일문화상>(예술상) 수상.
1972. 제4회 칸느 회화제 출품, 청주 북일면에 2만5000평 산 매입.
1974. 우향을 설득하여 귀국
1976. 우향 박래현 사망
‘바보산수’화풍에 집중
1977. 성북동에 ‘운향미술관’ 건립 50점 작품 전시
제19회 3·1 문화상 수상
1979. 청주에 한옥과 미술관 짓기 시작
1980. 사단법인 <농아복지회> 등록
1981. 예술원 정회원으로 위촉.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1984. 운보의집 완공
1993. 팔순기념 대회고전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림
운보의 집에서 작품 15점을 도난 당함.
1999년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 <운보 김기창 예술론 연구> 출간.
2001.1.23. 타계
